입력 : 2009.11.30 03:30
'베니스의 상인' 명동예술극장서 11일 개막

비쩍 마른 몸과 희고 텁수룩한 수염, 당장에라도 빽 소리지를 것 같은 눈빛…. 배우 오현경(73)은 풍기는 분위기부터 샤일록이었다. 셰익스피어의 희곡 《베니스의 상인》에서 "돈을 못 갚으면 살 1파운드를 떼줘야 한다"고 요구한 그 고리대금업자 말이다.
오현경은 12월 11일 서울 명동예술극장에서 개막하는 《베니스의 상인》(연출 이윤택)에서 샤일록이 된다. 이 연극은 안토니오가 청혼하러 가는 친구 밧사니오에게 줄 여비를 유대인 샤일록에게 빌리면서 꼬이는 이야기다. 지난 26일 만난 오현경은 "이번에 그릴 샤일록은 흔히 짐작하듯 악인은 아니고 인간미가 있을 것"이라며 "동정심이 가고 좀 우스꽝스러운 인물"이라고 했다.
대중에게 오현경은 1980년대 연속극 《TV 손자병법》의 만년과장 이장수로 기억된다. 부하 직원에게는 큰소리치지만 상사에겐 아양 떨고, '이번엔 승진 하냐'는 부인의 물음엔 밤하늘을 보며 한숨 쉬는 샐러리맨이었다. 오현경은 "코미디는 감각도 좋아야 하지만 타이밍이 더 중요하다"며 "돈 잃어버린 딸을 호통치다가도 안토니오가 파산했다는 소식에 아이처럼 좋아하는 샤일록에겐 희극미가 있다"고 했다.
이 낭만 희극에서 샤일록은 재판에 진다. 그에게만 비극인 셈이다. 그런데 오현경은 "마지막엔 내가 다 뒤집는다"며 웃었다. "'살은 베되 피 한 방울 흘려서는 안 된다'는 유명한 판결 뒤에 샤일록은 '원금이라도 받을 수 없겠냐'며 떼를 쓰지요. 그리고 커튼콜 때 나와서는 '이 연극은 사기다!'라며 깽판을 치는 겁니다."
지난 4월 서울연극제에 초청된 《봄날》은 '오현경의 연극'이었다. 그는 자식들에게 절대권력처럼 군림하다 소멸해가는 아버지를 그려냈다. 차돌 같은 인상, 지칠 줄 모르는 탐욕, 젊은 배우들을 압도하는 눈빛과 발성을 보여줬다.
셰익스피어의 《햄릿》에서 폴로니우스가 집 떠나는 아들 레어티즈에게 하는 충고 중에 "빚을 주면 돈과 사람 둘 다 잃고, 빚을 지면 네 마음이 무디어진다"는 대목이 있다. 배우 오현경의 좌우명은 '분수를 알고 체면을 지키자'였다. "얼굴을 상품으로 만들고 싶지 않아 밀려드는 광고를 한 편도 찍지 않았다"는 그는 "누구나 한 가지쯤 지키고 싶은 게 있지 않으냐"고 했다.
투지 넘치는 연출가 이윤택은 오랜만에 말랑말랑한 연극을 골랐다. 그는 "오현경 선생은 분장이 필요없는 샤일록"이라며 "경쾌한 춤과 랩도 넣을 것"이라고 말했다. 남장(男裝)하고 재판관이 되는 포샤는 윤석화·김소희가 나눠 맡는다. 정호빈이 안토니오를, 한명구가 밧사니오를 연기한다. 김길호·이승헌·주인영 등 출연. 1644-20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