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마흔에 진짜 연기를 알았다

  • scene PLAYBILL editor_김아형
  • 사진제공=뮤지컬헤븐

입력 : 2009.11.20 10:00

배우 황정민 인터뷰

비로소 자유로워지다.

수염이 상당한데요.이준익 감독의 '구르믈 벗어난 달처럼' 촬영은 잘 되어가나요?

촬영은 중반부를 넘어서서 11월 초면 거의 마무리 될 거예요. 지난주에 제천 촬영을 마치고 이제 고창과 창녕 우포늪 등 또 지방 촬영을 가야해요. 제작발표회 땐 어쩔 수 없이 이 수염으로 가겠지만 (웃음) 개막 전엔 잘라야죠. 추가 촬영 분때는 수염을 붙여도 무방하다고 감독님이 허락하셨으니까. 제대로 된 사극은 처음인데 재미있더라고요.

솔직히 뮤지컬 '웨딩싱어'는 의외라고 생각했어요. 그동안의 행보를 보면 조금 더 무겁거나 실험적인 이야기를 할 줄 알았거든요.

재작년 뮤지컬 '나인'을 앞두고 고민이 많았어요. '브로드웨이 42번가' 이후 4년 만에 하는 공연이라. 지금도 그렇지만 뮤지컬은 화려하고 쇼적인 작품 위주로 돌아가고 간혹 그렇지 않은 작품은 외면당하기 일쑤였죠. 공연에서 조금 떨어져 있어보니 관객층은 늘었다는데 일부 공연에만 몰리는 현상이나 흠잡기에 여념이 없는 몇몇 마니아들이 답답하고 못마땅하더라고요. 그래서 "이런 어려운 작품도 있답니다"하고 본때를 보여 주고 싶다는 생각으로 '나인'을 택했어요.

흥행은 아쉽지만 전 무척 흥미롭게 봤어요.

그랬다니 다행이지만 관객들과의 소통은 실패했죠. 어쨌거나 공연은 관객들과의 소통이 최우선이니까요. 그때 결심했어요. "오케이, 관객들이 라이트한 작품을 원한다면 철저히 그런 작품으로 다가가겠다"고. 밝고 말랑한 <웨딩싱어>를 선택한 건 그런 이유죠. 작품으로 관객들과 이야기를 하고 싶은 마음이 먼저였어요. 원작 영화도 재미있게 봤고요.

뮤지컬은 영화보다 쇼적이고 80년대 분위기가 물씬하던데요. 특히 영화에는 '올드 팝'이 많이 등장하는데 뮤지컬은 한 곡을 제외하곤 다 새롭게 작곡된 노래더라고요.

제가 맡은 로비 역은 제목 그대로 결혼축가 전문가수라 노래가 꽤 많아요. 요즘은 개사한 가사들을 다듬고 있는데 음악이 워낙 좋아서 큰 걱정은 안돼요.

그러고 보니 '웨딩싱어' 팀에서 최고참이겠군요?

그러게요. 상대역부터 조연들까지 다 비슷한 또래인데 저만 나이가 많아요. 저 나이 같은 거 안 따지는 사람인데 묘하게 소외감이 들데요. (웃음) 배우가 자기 몫만 잘 해낸다면 그깟 나이가 무슨 상관이겠어요. 다들 프로잖아요. 그래서 선배랍시고 힘을 주기보단 동료로 편안하게 다가가려해요.

예전에 본 인터뷰 중에 인상적인 얘기가 있었어요. 스크린에서 주목받기 시작할 무렵이었는데 "충무로와 대학로 중 하나만 택해야 한다면 대학로에 남고 싶다"라고 했어요. 글을 쓴 기자는 이제 막 황정민의 매력을 발견했는데 돌아가는 건 아직 이르다며 글을 마쳤지만, 공연 기자인 제 입장에서는 너무나 인상적인 한마디였죠.

아아. 기억나요. 예전에 관객이 없어서 공연을 못한 적이 있었어요. 혹자는 한 명의 관객이라도 오면 공연을 해야 한다고 했지만 몇 달을 죽어라 고생해서 올렸는데 텅 빈 객석을 보고 어떻게 연기가 나오겠어요. 우리는 좋은 공연이라 생각하고 본 사람들도 좋다는데 관객이 없다니 그보다 슬픈 일은 없죠. 만약 그 공연에 유명한 배우가 한 명이라도 나온다면 관객들이 그렇게 외면을 했을까요? 그게 영화를 하게 된 가장 큰 동기에요. 내가 유명한 배우가 되어서 다시 무대에 오르면 많은 사람들이 공연을 보러 와주겠지 하는. (웃음)

(웃음) 무척 슬픈 이야기인데 웃어버렸네요.

사실인걸요. 그래서 영화를 하게 되었고, 열심히 했고, 그래서 이제 나름 유명해졌다고 생각할 쯤 다시 무대에 섰지요. 그건 오래전에 한 나와의 약속이었어요. '나인'을 시작으로 매년 한두 편씩 공연을 하겠다는 결심도 변함없어요. 그러다 보면 서서히 영화에서 무대로 무게 중심이 옮겨오겠죠.

대학로에서 충무로로 진출해 성공한 배우들은 좀처럼 무대로 돌아오지 않잖아요. 어려운 약속을 지킨 셈인데요. 공교롭게도 연예인 캐스팅이 비일비재한 시점이라 같은 격으로 오해받지는 않는지요?

무대는 철저한 계산이 필요한 공간이에요. 그 무대를 위해 배우와 배우 사이, 배우와 스태프 사이에 많은 약속들이 전제되어 있고요. 그런 약속들을 관객들이 눈치 채지 못하게 하는 작업이 곧 연습이죠. 그런데 무대를 어떤 수단으로 삼거나, 혹은 아무런 준비 없이 쉽게 오르는 연예인들이 있더라고요. 오래지 않아 그런 이들은 제 풀에 지쳐 떨어져 나가고 말 테니 크게 신경 안써요.

무대 경험을 일찌감치 했던데요. 계원예고 시절 친구들과 '갓스펠' 공연을 올린 일화가 유명하더라고요.

(웃음) 뭘 몰라서 겁이 없었던 거죠. 고3 때 친구 몇몇과 무슨 깡이었는지 학력고사도 포기하면서 공연을 올리겠다고 한바탕 법석을 떨었어요. 막은 올렸지만 결과는 암담했고 진상을 알게 된 부모님과 선생님께 죽을 만큼 혼이 났죠. 그런 사건이 있었기에 무대가 신성한 곳임을, 함부로 설 공간이 아니라는 것을 남보다 먼저 깨달았지요.

대학 때는 연기가 아니라 무대미술을 전공했던데요?

고등학교 3년 내내 연기를 했는데 대학 가서 또 하자니 식상하단 생각이 들었어요. 평생 연기를 할 거라면 학교 때만이라도 다른 걸 해보자 싶었죠. 원래 미술에 관심이 많아서 무대미술을 택했어요. 대학 때 친구들은 제가 연기를 하자 많이들 놀랐죠.

(웃음) 졸업하고 바로 극단 학전에 들어간 건가요?

아뇨. 남산드라마센터(현, 남산예술센터)에서 잠시 무대미술 팀으로 일했어요. 그때 배운 극장에 관한 많은 것들이 배우 생활을 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죠. 학전은 1994년에 '지하철 1호선' 오디션을 봐서 입단했어요. 3년 정도 학전에 몸담았다 다른 극단에서 활동 했지만, '지하철 1호선'에 대한 애정이 큰 터라 1000회 때 독일 공연이며 2000회·3000회 중요한 기점에는 빠지지 않고 참석했죠. 그 후 극단 대중에서 뮤지컬 '캐츠'를 하게 되었고 거기서 아내를 만났어요.

그렇잖아도 궁금했어요. '웨딩싱어'는 소재가 소재인지라 로비의 프러포즈 씬이 참 인상적인데요. 실제 프러포즈는 어떻게 하셨나요?

사실 전 프러포즈도 못했어요. 제가 워낙 이벤트에 약해요. (웃음) 게다가 부각되는 걸 안 좋아해서 파티나 시상식장도 꺼리거든요. 아내는 프러포즈 못 받은 게 여태 불만인 모양인데 저는 행복하게 잘살면 됐지 그런 게 뭐 중요하냐며 응수하죠. 그나저나 이 작품 보러오면 큰일 나겠는 걸요. 하하.

로비가 청혼할 때 부르는 'Grow Old with You'에서 가장 좋은 만남은 서로를 발전시키는 만남이란 말이 떠올랐어요. 황정민 씨도 결혼 후에 발전한 부분이 많지 않나요?

결혼한 지 어느덧 5년이 지났는데 모든 면이 전보다 좋아요. 집이 편하니까 나가서 술 먹는 횟수가 줄어들고, 아이랑 더 많이 놀아주게 되고. 아내에게 미안한 게 많죠. 춤을 끝장나게 잘 추던 배우였는데 아이 키우느라 쉬고 있으니까요. 다시 무대에 선다 해도 요즘은 배우 층이 너무 젊어서 아내가 할 만한 작품이 있을지가 걱정이에요. 농담으로 그러죠. "당신이 다시 무대에 서려면 우리가 직접 제작을 해야 할 것"이라고. (웃음)

뮤지컬 배우 층이 지나치게 젊은 쪽으로 편중된 건 정말 문제에요.

저와 함께 무대에 섰던 선배나 동료들은 이제 거의 남아있지 않아요. 40대가 배우에게 얼마나 훌륭한 시기인데 아쉬울 뿐이죠. 외국에는 40대 배우들이 얼마나 많던가요. 마흔 넘은 배우가 '그리스'를 할 정도니. 공연계의 발전을 위해서도 배우의 층이 다양해지길 바래요.

그러고 보니 올해 마흔이 되셨죠. 어서 마흔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말을 빈번히 해왔는데 실제 마흔이 되니 어떤가요?

예상했던 대로 참 좋아요. 여유도 생겼고 얼마 전부터는 나 자신을 믿게 되었어요.

그동안은 못 믿었단 뜻인가요? 그렇다면 믿게 된 계기도 있을 텐데요.

그동안 내 스스로가 못미더워서 자신을 학대하며 작업해왔다는 걸 깨닫기 시작한 거죠. '그림자 살인'은 스스로를 믿게 된 첫 작품이에요. 홍진호라는 탐정 역을 앞두고 예전 같으면 '어떻게 표현할까' 끊임없이 고민하면서 촬영에 임했을 텐데 그때는 '넌 홍진호니까 다른 생각하지 말고 연기해' 그렇게 스스로를 믿어버렸어요. 심하다 싶을 정도로 편한 마음으로 촬영을 했는데 결과물을 보니까 괜찮은 거예요. 홍진호 같더라고요. '아, 나를 믿는다는 게 이런 거구나'하는 느낌을 맛보자 다음 작품, 그 다음 작품이 기다려지는 거예요.

중요한 건 이야기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 마흔이 되자 커다란 변화가 생겼군요.

배우들끼리 "야 너 오늘 천장에 붙어서 연기하드라"하는 이야기가 있어요. 연기 잘한다는 칭찬인데 어릴 땐 마흔이 되면 다 천장에 붙어서 연기를 하는 줄 알았죠. 그런데 그게 아니라 내 마음을 스스로를 믿게 되면서 연기가 자연스러워지는 거더라고요. 그리고 그건 그 전까지 스스로의 목을 죄고 피를 말리던 고통의 시간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죠. '로드무비'를 찍을 때 온몸에 심한 두드러기가 났었어요. 태어나기를 여자만 보고 살라고 났는데 동성애를 연기해야 하니 '넌 거짓으로 연기하고 있다'고 속으로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았던 모양이에요.

이를테면 연기에 대한 결벽증 같은 것이군요. 항상 힘주어 말하던 정직한 연기와 통하는.

연기는 정직이 최우선이에요. 돈을 내고 공연을 보러 온 관객들에게 거짓 연기로 오답을 정답이라 가르쳐 주는 것보다 나쁜 짓이 또 있을까요. 진실하지 않은 연기가 들통 나는 건 시간 문제에요.

그렇다면 지독한 악함과 바보 같은 착함을 모두 갖고 있단 말인가요? 영화 '달콤한 인생'의 백사장과 TV드라마 '그저 바라만 보다'의 구동백 사이의 간극은 너무나 크거든요.

표현 방법이 각기 다를 뿐, 사람은 모두 착한 면과 악한 면을 가지고 있죠. 선한 역을 맡으면 착한 면을 어떻게 끌어낼지 고민하고, 악역을 맡으면 악한 면을 어떻게 부각시킬지 연구하는 거예요. 중요한 건 어떤 역이냐 보다, 이야기 안에서 인물이 어떤 식으로 행동하고 살아가느냐가 아닐까요. 예를 들면 <웨딩싱어>에서 로비란 인물의 미래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아요. 그보다는 이 사람 어떤 시기를 어떻게 살아와서 지금 웨딩싱어를 하고 있는지가 중요하죠. 황정민이 아니라 로비 하트를 보여주는 거니까 그의 이야기를 상상하고 고민하면서 대본 속 로비 하트에게 숨을 불어 넣어야죠.

지금 한 이야기는 작품을 고르는 기준과도 일맥상통 할 것 같은데요?

작품을 고르는 기준 역시 이야기죠. 이 이야기로 관객들과 소통할 수 있을지를 따져 봐요. 관객들이 이 이야기를 연기하는 나에게 유대감을 가질 수 있을까. 관객이 이 이야기를 진정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 스스로 묻다 보면 답이 나오거든요.

'나인'은 소통 난항을 예상하면서도 택한 작품이잖아요. 혹 작품 속 귀도의 고뇌에 공감했기 때문은 아닌가요?

당시 내 상황과 맞아 떨어졌기에 더 끌렸던 것 같아요. '너는 내 운명'의 촬영이 끝날 쯤 강원도에 물난리가 났었어요. 그 수해현장에는 자기 삶도 버거운 사람들이 발 벗고 나서서 가진 것들을 나누고 있었죠. 함께 하지 못하는 자신이 창피한 한편 우리 사회가 저분들 덕분에 돌아간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그들에게 "당신들이 바로 슈퍼맨입니다"라는 이야기를 건네고 싶었죠. 제 말에 동조했던 기획 PD는 얼마 뒤 '슈퍼맨이었던 사나이'의 시나리오를 건네주었고, 이 영화를 하는 건 이 시대를 사는 배우로서의 의무라고 생각했어요. 관객들도 나와 같은 마음일 것이라 자신했는데 뚜껑을 열어보니 참패했더라고요. 그리고는 '나인'을 하게 됐는데 귀도의 심정이 딱 내 심정인 거예요. 오만했던 귀도가 무너지기 시작하는 것을 보며 오만한 태도로 '슈퍼맨이었던 사나이'를 내놓던 나를 봤거든요.

저는 '나인'을 보면서 대중에게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보여줘야 하는 예술가의 부담에 공감했으리라 생각했거든요. 관객들이 황정민에게 기대하는 것들이 때론 부담되지 않나요?

새로운 것을 보여줘야 한다는 생각을 아예 하지 않으니 애초에 부담이랄 게 없어요. 왜냐하면 작품마다 이야기가 다르고 인물이 다르니까 당연히 모든 게 다르게 보일 것이라 믿거든요. '달콤한 인생'이 끝나고 바로 '사생결단' 러브콜을 받았는데 그 역시 비슷한 느낌의 악역이었어요. 보통은 피할 텐데 저는 이야기가 다르니까 분명 새로운 악역이 나올 거라고 믿고 감행했죠. 이야기가 있고 인물이 나왔지, 인물이 있고 이야기가 나온 게 아니니까 이야기를 먼저 봐야죠. 이번에 TV드라마 '그저 바라만 보다'를 할 때도 영화 '너는 내 운명'과 비슷한 이미지라며 말들이 많았지만 드라마가 시작되니까 쏙 들어가더라고요. 착하고 순박한 남자란 이미지는 비슷하지만 둘은 아주 다른 이야기니까요.

궁극적으로 무대에서 하고 싶은 이야기 있나요?

하고 싶은 이야기야 많죠. 기회가 되고 여유만 있다면 무언극도 해보고 싶고. 관객과 함께 즐길 수 있는 공연을 만들어보고도 싶어요. 하물며 아이스크림도 골라먹는 재미가 있는데 우리 공연계는 왜 뮤지컬과 정극, 둘 뿐일까요. 언젠가는 관객에게 독특한 실험극부터 셰익스피어까지 다양한 공연들을 실컷 보여주고 싶어요.
  • C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