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사랑하고 후회하고 무너진 인생

  • 박돈규 기자

입력 : 2009.11.12 03:10

서울국제공연예술제 초청작 '플라토노프'

연극 《플라토노프(Platonov)》의 무대는 밧줄에 꽁꽁 묶인 큰 나룻배다. 과부 안나는 드러누운 채 "지루하고 우울하다"고 푸념한다. 떠날 수 없는 곳에서 술을 마시며 따분한 시간과 싸우는 이 풍경은 러시아 극작가 안톤 체호프(1860~1904)의 《세자매》 《갈매기》에서 본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플라토노프》는 체호프가 18세에 썼다는 희곡으로 그의 사후인 1920년에 발견됐고 이번이 국내 초연이다. 아내가 있으면서도 안나, 유부녀 소피아 등 두 여인과 사랑을 나누고 후회하고 흔들리는 플라토노프의 이야기다. 사랑과 이별, 삶과 죽음을 다루면서 망상(妄想)을 희극적으로 구체화하는 대목이 흥미로웠다. 3시간에 달하는 이 연극의 1막은 좀 답답했지만 2막에 이르자 묘하게 집중이 됐다. 무대에는 더 나아가지 못하고 묶인 인생이 있었고, 그 운명적인 결핍이 관객의 마음을 잡아당겼다.

《플라토노프》에는 사랑하고 싸우고 술에 취하고 노래하고 춤추는 풍경이 있다. 인생이다./서울국제공연예술제 제공

《플라토노프》는 올해 서울국제공연예술제 초청작이다. 러시아 연출가 유리 코르돈스키는 오브제(사물)를 신선한 방식으로 쓰며 유머러스하게 이야기를 굴렸다. 사람이 매달리고, 첼로를 걸어놓고, 바구니를 건너편으로 보내는 등 밧줄은 쓰임새가 다양했다. 나룻배 밑의 물에 배우가 빠지는 장면, 총을 쏘려다 실패하는 대목이 재미있었다. 그러나 한글 자막(字幕)은 엉망에 가까웠다.

마지막 순간, 《플라토노프》는 가슴이 뻥 뚫리는 장면을 보여준다. 플라토노프가 "머리가 하는 일을 가슴은 다르게 말한다"고 할 때다. 소피아가 총을 쏘려고 하는데 샴페인이 연쇄적으로 터진다. 펑펑펑펑펑. 코르크 마개들이 공중으로 4~5m씩 튀어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