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09.11.05 03:51
법원 "의혹 제기한 건 정당"
미술계는 일단 안도하면서 "작품 감정 체계화 계기로"
서울중앙지법 민사25부(재판장 조원철)는 4일 경매사인 서울옥션이 '빨래터'에 대해 위작 의혹을 제기했던 미술 전문지(誌) 아트레이드를 상대로 "허위 기사로 명예가 훼손됐으니 30억원을 배상하라"며 낸 소송에서 "그림의 원소장자가 박수근 화백으로부터 '빨래터'를 건네받은 것은 사실로 추정된다"고 밝혔다.
재판부는 "'빨래터'의 원소장자인 존 릭스씨가 1954~1956년 사이 한국에서 근무하면서 박수근 화백으로부터 '빨래터'를 포함한 그림 몇 점을 소장하게 됐다는 것은 관련 증거와 감정 결과를 바탕으로 보면 사실로 추정된다"고 밝혔다.
재판부는 그러나 "50년 만에 모습을 드러낸 그림이 박 화백의 전형적인 스타일과 다소 달랐고 보관 상태가 완벽해 의심을 살 만한데도 경매 주관사에서 감정 결과를 구체적으로 알리지 않아 위작 의혹을 사기에 충분했다"며 아트레이드의 배상 책임은 인정하지 않았다.

'빨래터'는 2007년 5월 서울옥션을 통해 국내 경매사상 최고가인 45억2000만원에 거래됐다. 하지만 그해 12월 미술전문지 아트레이드가 창간호에서 위작 의혹을 제기했고, 서울옥션은 작년 1월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냈다.
'빨래터'에 대한 법원의 판단이 내려지면서 미술계는 일단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있다. 미술계는 그동안 '국민작가'로 불리는 박수근 화백의 작품이 위작 논란에 휩싸이면서 가뜩이나 경제 위기로 미술시장이 어려운데 악재가 겹쳤다며 발을 구르고 있었다.
작품이 논란에 휩싸이자 서울옥션에서 '빨래터'를 낙찰받은 박연구 삼호산업 회장은 지난해 12월 서울옥션에 작품을 되돌려줬다. 일부 화랑에는 박수근 화백을 비롯한 주요 작가의 고가(高價) 작품을 산 소장자들이 자신의 소장품이 진짜인지 묻는 문의가 이어졌다.
표미선 한국화랑협회 회장은 "그동안 화랑 주인이라고 소개하면 '빨래터가 가짜라면서요'라는 인사부터 받았다"면서 "'빨래터' 위작 시비로 다른 작가의 작품도 의심받는 등 미술계 전체가 어려움을 겪었는데 이번에 결론이 나서 다행이다"고 말했다. 김창실 선화랑 대표는 "작품의 진위를 법원에 맡기는 난센스가 벌어졌는데 앞으로는 파는 사람이나 의혹을 제기하는 사람 모두 신중했으면 한다"고 말했다.
'빨래터' 논란을 계기로 국내 미술품 감정을 체계화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서진수 미술시장연구소 소장(강남대 교수)은 "이번 논란에서 박수근 화백에 대한 전문가나 데이터베이스가 제대로 없는 취약점이 그대로 드러났다"면서 "연구자나 전문가, 미술관이 공동으로 노력해 국내 미술시장이 양성화되고 한 단계 높아지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고 말했다. 최병식 경희대 교수는 ▲미술품 감정 매뉴얼 체계화 ▲개별 작가에 대한 개인 전문가 양성 ▲작가의 전작 도록(카탈로그 레조네) 제작이 시급하다고 주장했다.
외국의 경우 주요 작가의 전체 작품과 자료를 담은 '전작(全作) 도록'이 있어 위작 시비에 대응하고 있지만 국내는 거의 없는 상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