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동서남북] '한국 근대 조각의 최고봉' 권진규를 아시나요?

  • 도쿄=손정미 기자

입력 : 2009.10.28 09:40 | 수정 : 2009.10.28 09:45

30년만에 부활한 권진규

10월18일 일본 하네다 공항에 마중 나온 사람은 무사시노미술대학 조각과의 구로카와 히로타케 교수였다. 이 대학은 이중섭 등이 공부하기도 했던 명문 미술대학. 우리는 소바로 점심을 간단하게 먹고 무사시노미술대학으로 향했다. 권진규 유가족은 무사시노미술대학이 한국 근대 조각의 최고봉으로 꼽히는 권진규(權鎭圭·1922-1973) 전시를 도쿄국립근대미술관과 함께 열기로해 개막식을 하루 앞두고 도착했다. 나는 권진규의 유가족으로 ‘권진규기념사업회’ 명예회장과 상임이사를 맡고 있는 막내 여동생 권경숙씨와 허경회 이사(권진규의 조카)와 함께 도쿄를 찾았다.

무사시노미술대학 미술자료도서관 전시장 입구에 들어서자 권진규의 작품이 펼쳐졌다. 첫 작품은 말 머리를 조각한 <마두(馬頭)>였다. 권진규가 일본 재야(在野) 미전(美展)인 이과전에 출품해 입상한 작품이었다. 미니멀하면서도 세련미가 돋보이는 작품이다. 한쪽에는 권진규가 대학 졸업작품으로 내놓았던 <여인상>이 서 있었다. 권진규의 작품 중 유일하게 알려진 등신대 작품으로 무사시노미술대학 시절 단짝이었던 센나 히데오씨가 지금까지 갖고 있었던 작품이다. 센나 히데오씨는 한번도 작품을 내놓지 않았지만 구로카와 교수가 몇 번이나 찾아가 설득하자 마음을 열었다.

전시장 입구에는 권진규의 초기 작품이 놓여있고 전시장 계단을 올라가면 그의 스승이었던 이 대학 조각과 시미즈 다카시 교수의 작품이 전시되고 있었다. 시미즈 다카시는 프랑스의 세계적인 거장 부르델에게서 배운 인물로 무사시노미술대학에 조각과를 세운 대부(代父)였다.

도쿄국립근대미술관 <권진규전> 전시장에서 작품 '지원의 얼굴' 앞에 선 주역들. 왼쪽부터 무사시노미술대학 구로카와 히로타케 교수와 박형국 교수, 마츠모토 도오루 도쿄국립근대미술관 부관장, 권진규기념사업회 명예회장인 권경숙씨(왼쪽부터). / 도쿄=손정미 기자
무사시노미술대학 조각과는 2년 전부터 개교 80주년(2009년)을 맞아 조각과 출신 중에 가장 위대한 예술성을 보여준 사람을 찾아나섰다. 처음에는 조각과를 세운 시미즈 다카시 교수를 연구하고 그의 작품을 전시하려다 제자였던 권진규를 발견했다. 배경에는 이 대학에서 미술사를 가르치고 있는 박형국 교수의 노력이 있었다. 박형국 교수는 무사시노미술대학을 거친 한국인 작가들에 대한 자료를 조사하다 권진규라는 인물을 찾아냈다. 박 교수는 권진규의 이름은 알려져있었지만 예술성에 비해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다고 판단했다. 박 교수의 자료 추적과 무사시노미술대학 조각과의 위대한 인물 찾기가 ‘권진규’라는 한 점에서 만난 것이었다. 구로카와 교수와 박 교수는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무려 250명이 넘는 사람을 만나 일일이 인터뷰하고 자료를 찾았다. 자료를 받은 사람만 100명이 넘었다. 가나아트 이호재 회장은 “일본에서 누가 자꾸 모찌(찹쌀떡)를 들고 와서 기다렸다. 처음엔 바빠서 만나주지 못하자 이들은 서울에 모텔방을 잡아놓고 며칠씩 기다렸다”고 말했다. 이호재 회장 역시 권진규 작품을 가지고 있고 유족과의 관계가 깊었다.

권경숙 씨는 권진규의 바로 아래동생으로 혼자 살던 오빠를 보살펴줬다. 오빠가 작고한 뒤에도 30년가까이 오빠의 유작을 팔지 않고 그대로 보존해왔다. 이화여대 영문과를 졸업해 당시로선 엘리트 여성이었던 권 씨는 “죽기 전에 오빠의 미술관이 세워지는 걸 보겠다. 그 전에는 죽을 수 없다”고 말했다.

사실 중심으로 자료를 찾아나가다 보니 극화되거나 미화됐던 권진규에 대한 덧칠이 벗겨졌다. ‘한국 근대 조각의 최고봉’으로 꼽히는 권진규는 14세 때 함흥 상공회의소에서 개최한 전시회에 나무를 깎아 만든 실패 <사슴>을 출품해 입상할 정도로 조각에 재능을 보였다. 이쾌대, 이중섭 등이 공부했던 무사시노미술대학에 들어가 시미즈 다카시 교수로부터 배웠다. 권진규는 테라코타와 석조를 무사시노미술대학에서 처음 시작할 정도로 후배들에게 영향을 줬다. 기대를 모았던 권진규는 고국에 돌아왔지만 국내 미술계의 따돌림과 외로움을 견디지 못해 1973년 생을 마감했다. 당시 국내 미술계는 서구의 추상미술이 거세게 몰아치던 때라 구상중심의 권진규 작풍은 촌스러운 것으로 치부됐다.

무사시노미술대학 구로카와 교수와 박 교수는 권진규의 작품 2점을 소장하고 있는 도쿄국립근대미술관에 작품을 빌리기 위해 문을 두드렸다. 도쿄국립근대미술관의 마츠모토 도오루 부관장은 권진규를 재발견하고 무사시노미술대학에 동반 전시를 하자고 말했다. 이들은 한국 국립현대미술관에 권 선생의 작품을 빌리기 위해 방문했다가 한국 전시까지 성사시켰다.

권경숙씨는 무사시노미술대학 전시장에 의자에 앉아 권진규의 첫부인이었던 일본 부인 도모씨와 만나 이야기꽃을 피웠다. 권씨는 “오빠는 도모와 함께 살았을 때 가장 행복해했다”면서 “제자나 다른 여자들과의 관계는 알려진 것과 다르다”고 말했다.

무사시노미술대학 미술자료도서관 제2전시장은 권진규가 한국에서 만든 작품들이 전시돼 있었다. 입구로 들어서는 순간 숨이 멎는 것 같았다. 인물상이 하나 하나 살아있었다. 낮은 조명 아래 빼곡이 들어선 인물상 사이로 권진규가 서 있는 것 같았다.

박형국 교수는 “권 선생의 작품은 앞이나 뒤, 어디에서 봐도 아름답다”며 “입체감을 느낄 수 있게, 뒤에서도 감상할 수 있게 작품을 배치했다”고 말했다. ‘부서지기 쉬운 테라코타 작품을 너무 촘촘이 세운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박 교수의 말을 듣고 보니 일리가 있었다. 100점에 가까운 권진규의 작품이 한자리에 모인 것은 처음이었다. 인물상들이 관람객을 뚫어보고 있는 듯 했다.

다음날인 19일 오후 3시 도쿄국립근대미술관에서 <권진규전> 개막식이 열렸다. 구로카와 교수에게 누군가 다가와 힘찬 포옹을 나눴다. 일본 사람들에게서 보기 힘들 정도로 힘차게 껴앉고 반가워 했다. 알고 보니 권진규의 대학 동기 센나 히데오씨였다. 권경숙 씨는 오빠의 전시장을 둘러보며 감격스러워했다. 마츠모토 부관장은 개막식을 준비하느라 이리뛰고 저리뛰며 바빴다.

도쿄국립근대미술관에 전시된 작품은 권진규가 1968년 7월 도쿄 니혼바시화랑에서 가졌던 전시회 출품작을 중심으로 30점이 나왔다. 당시 니혼바시화랑 전시회에 출품됐던 <지원의 얼굴>이 40여년만에 도쿄국립근대미술관에 전시된 것이다. 일본인을 제외하고 아시아 작가가 도쿄국립근대미술관에서 개인전을 갖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권 선생은 세상을 떠나기 전 동생 권경숙씨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인간의 아이는 언젠가 죽지만 내가 만든 아이(작품)들은 영원히 죽지 않는다.” 자신의 말처럼 영원히 죽지 않는 작품을 남겨 30년만에 부활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