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식 ABC] 영화 '주홍글씨'에 담긴 베르디 '운명의 힘'

  • 김성현 기자

입력 : 2009.10.12 03:15

베르디 오페라《운명의 힘》을 사용한 음악영화 《주홍글씨》.
살인 사건을 수사하러 가는 형사는 운전 도중 연방 휴대전화로 통화를 합니다. 차 안에서는 '신이여, 평화를 주소서(Pace, pace, mio Dio)'라는 오페라 아리아가 흘러나오고 있습니다. 마리아 칼라스와 함께 20세기를 양분했던 소프라노 레나타 테발디의 목소리입니다.

강력계 형사 역을 맡은 한석규씨는 다짜고짜 수화기 너머로 "너, 파체(평화)가 무슨 말인 줄 아느냐"라고 묻습니다. 대답은 듣지도 않은 채, 이 형사는 "평화, 응, 신이시여 평화를"이라는 노래 가사를 그대로 읊어줍니다. 형사는 "이런 날, 머리 깨져 돌아가셨으면, 평화롭긴 좀 힘드셨겠다. 이 좋은 날, 깨진 머리 보러 가는 나는 평화롭겠냐"라고 냉소적으로 말합니다.

변혁 감독의 영화 《주홍글씨》의 첫 장면입니다. 평화를 처절하게 갈구하는 이 아리아가 담겨 있는 베르디의 오페라가 《운명의 힘》입니다.

오페라의 남자 주인공 돈 알바로는 싸울 의사가 없었지만, 바닥에 떨어진 권총에서 우연히 총알이 격발되면서 사랑하는 여인 레오노라의 아버지를 죽음에 빠뜨립니다. 레오노라의 오빠 돈 카를로는 복수를 다짐하고 이들 셋이 다시 마주치는 그 순간, 오페라는 파멸로 이어집니다. 주인공은 신에게 영혼을 의탁하면서까지 벗어나려고 했지만, 그 누구도 '운명의 힘'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던 것이지요.

수도원을 찾아간 여주인공 레오노라가 고통을 토로하면서 차라리 "죽음이 어서 찾아와서 내게 평화를 달라"고 간절하게 호소하는 노래가 바로 이 아리아입니다.

러시아 황실의 요청으로 1862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초연된 이 오페라는 이야기 구성상 적지 않은 난점을 지니고 있습니다. 삶과 죽음이 엇갈리는 처절한 전장(戰場)에서 원수를 알아차리고, 속세의 모진 운명을 피해 수도원까지 달아났는데도 용케 재회하는 것이지요.

요즘 TV 드라마에서 주인공들이 모두 한동네에 살기라도 하는 듯이 쉽게 마주치고 헤어질 때 시청자들이 느끼는 어색함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주부 시청자를 대상으로 한 통속적 드라마를 '소프 오페라(soap opera)'라고 타박하지만, 실은 이 오페라야말로 원조 '소프 오페라'인 셈입니다.

안방극장까지 불륜이 자유롭게 침투하는 이 시대에 지나치게 무겁고 진지하기에 영화 《주홍글씨》는 폭넓은 대중의 지지를 끌어내지는 못했습니다. 하지만 첫 장면과 쇼스타코비치의 첼로 협주곡 1번부터 지금은 고인이 된 영화배우 이은주씨가 열창했던 코어스(The Corrs)의 팝송 〈내가 잠들어 있을 때만(Only When I Dream)〉까지 《주홍글씨》는 탁월한 '음악 영화'입니다. 영화를 볼 때 오페라가, 오페라를 들을 때 영화가 떠오르는 이유입니다.

▶서울시오페라단, 베르디 오페라 《운명의 힘》, 11월 19~22일 세종문화회관, (02) 399-11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