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해범 후손, 명성황후 노래에 말 없이 눈물만…

  • 구마모토=허윤희 기자

입력 : 2009.10.09 06:15

뮤지컬 '명성황후' 구마모토에서 日 첫무대

"왜 이리 아침은 더디 밝는가/ 이 가슴은 왜 이렇게 서늘한가/…/ 누가 나에게 빛을 다오/ 어둔 밤을 비춰다오…."

8일 저녁 일본 규슈 구마모토의 가쿠엔 대학. 배우 이태원이 뮤지컬 《명성황후》 삽입곡을 불렀다. 명성황후가 죽음을 예감하는 노래 〈어둔 밤을 비춰다오〉가 강당 가득 쩌렁쩌렁 울렸다.

순간, 객석에 앉아 있던 노(老)신사의 눈가가 젖어들었다. 명성황후 시해범의 외손자인 가와노 다스미(河野龍巳·88)씨. 1895년 경복궁에 뛰어들어 명성황후를 시해한 주범인 구니토모 시게아키(國友重章)가 그의 외할아버지다.

뮤지컬〈명성황후〉의 첫 일본 공연장을 찾은 명성황후 시해범 후손인 가와노(오른 쪽)씨가 8일 명성황후 역을 맡은 배우 이태원씨에게 인사를 건네고 있다./에이콤 제공
뮤지컬 《명성황후》가 초연 이후 14년 만에 처음으로 일본 땅을 밟았다. 이날은 명성황후가 시해된 기일이었다. 명성황후 시해에 가담했던 일본인 48명 중 21명의 고향이 이곳이고, 지난 2004년 일본의 전·현직 교사들이 만든 '명성황후를 생각하는 모임'이 있는 곳이기도 하다. 이번 공연을 성사시키는 데 주도적 역할을 한 '모임' 회원을 비롯해 일본인 관객 700여명이 객석을 가득 메웠다.

"노래를 들으면서 눈물이 났습니다…." 공연 후 배우 분장실로 찾아온 가와노씨의 말에 명성황후 역의 이태원씨가 "저도 부르면서 눈물이 나려고 했다"고 답했다. 가와노씨가 선물로 준비한 팔찌를 이씨 손목에 걸어줬고, 짧지만 따뜻한 대화가 오갔다. "일본에 와서 공연하니까 가슴이 훈훈해지는 것 같아요."(이태원) "네, 대담하게 (공연)하세요. 다음 공연은 도쿄에서 하시고요. 꼭 가겠습니다."(가와노)

'이해와 화해의 시간 속으로'라는 부제가 붙은 이날 공연은 《명성황후》의 하이라이트 장면을 모은 영상물이 1시간 동안 상영되는 가운데 배우들의 라이브 열창이 보태졌다. 이태원을 비롯해 박완(고종), 지혜근(홍계훈 장군) 등이 노래 5곡을 불렀다. 명성황후가 시해되는 급박한 장면에 이어, 웅장한 합창으로 공연이 끝나자 객석에서 박수가 터져 나왔다.

대학생 나카가와 요시미(18)양은 "공연을 보기 전까지 명성황후 시해 사건에 대해 전혀 몰랐다"며 "《명성황후》 본 공연을 한다면 꼭 다시 보고 싶다"고 했다. 연출가 윤호진씨는 "양국의 진정한 이해와 화해를 위해 민간교류 차원에서 마련한 공연"이라며 "이런 기회를 통해 서로 응어리가 풀어지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1995년 명성황후 서거 100주년을 맞아 초연돼 지금까지 120만 관객을 동원한 뮤지컬 《명성황후》는 11월 28일부터 12월 29일까지 국립극장 해오름극장에서 다시 공연된다. 1997년부터 이 작품에 출연한 배우 이태원과 새롭게 합류한 조안나가 명성황후 역을 맡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