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 없는 게 아니라 귀가 있으니까 - 시각장애 성악가 이소영

  • 글 사진 영상=박종인 기자

입력 : 2009.09.25 0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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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가 피아노 앞에서 섰다. 이소영(27)이 건반에 손을 얹자 우주가 진동했다. 장미가 너울너울 춤을 추더니 빛덩이로 변하고, 천장에 붙어 있던 형광등도 형체 없는 빛덩이로 변했다. 천장, 벽, 바닥, 가방, 시계, 악보, 피아노, 천사장 미카엘, 우리들 숨소리와 감탄사, 기타 등등 모든 것들이 파동(波動) 하나로 어우러져 빛이 되었다. 빛을 잃고서 오직 소리로 우주를 창조하는 그녀, 이소영이다.

이소영의 손.
이소영을 만난 곳은 한국예술종합학교 음악원 지하 2층 연습실이었다. 그녀는 이 학교 성악과 졸업반이다. 성악. 소리를 듣고, 음표로 표시된 소리를 눈으로 보고, 뇌에서 이성과 감성으로 분석해 자신의 성대로 그 소리를 표현해야 하는 예술이다. 그 복잡한 과정 가운데 이소영에겐 중요한 단계가 불가능하다. 그녀는 앞을 보지 못한다.

선천성 백내장으로 오른쪽 눈은 실명. 왼쪽 눈은 형체만 분간할 수 있는 약시다. 그나마 안경 쓰고 0.2 정도 나왔던 시력이 작년 말에 극도로 악화되더니 지금은 도우미 없이는 활동 자체가 불가능하다.

세상 불공평하고 불평등하다 하지만, 이소영은 그 말도 안 되는 상실 대신에 남이 부러워할 능력을 가졌다. 그녀는 절대음감의 소유자다. “바람 소리, 문소리, 나뭇잎 떨어지는 소리에도 다 음계가 있다”고 했다. 그녀가 말했다.





소리는 이소영의 친구였다
그녀가 기저귀를 차고 다니던 세 살 때였다. 비틀대며 걸어다니는 계집아이가 실종됐다.

“엄마가 한참 찾아보니까 불도 안 켠 교회에서 피아노를 치고 있더래요. 워낙에 소리를 좋아해서 소리만 들리면 소리 나는 곳에 가서 쭈그리고 앉아 있곤 했대요.”

소리에 미친 아이는 고등학교도 인천예고에 들어가 작곡을 전공했다.


뒤로 서서 피아노를 치는 그녀


씩씩한 목소리로 얘기하던 소영이 자리에서 일어나 피아노 앞에 섰다. 크게 심호흡을 하고서 귀에 익은 선율을 연주했다. 자, 한 곡 완료. 다음 곡은 그녀가 작곡한 ‘삼천리 금수강산’이다. 그런데 이소영은 피아노를 등지고 서서 연주를 하는 게 아닌가. 뒤로 팔을 뻗어, 왼손 몫을 오른손이 오른손 몫을 왼손이 건반을 두드리는 게 아닌가. 무슨 묘기대행진도 아니고, 직접 보고 듣지 않으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놀라운 광경이었다.


두 번의 변주가 끝나고 연습실 허공에 마지막 음(音)이 사라지기 전, 그녀가 말했다. “그런데요, 눈이 없는데 귀가 있더라고요. 그것만 생각해요. 눈이 없는 게 아니라, 귀가 있다는 거. 그게 제 희망이에요. 그래서 지금은 희망으로 산답니다. 아, 이렇게 피아노를 치면 다리 운동이 장난이 아니에요.” 소영이 이 묘기의 비법을 설명한다. “머릿속에 거울을 떠올려요. 거울을 본다고 생각하면서 연습했어요.” ‘본다고’ 했다. 그렇듯, 의지가 굳은자에겐 마음에 눈이 있는 법이다.



“우리 같이 죽자”


소영은 날 때부터 앞을 보지 못했다. 아버지는 딸이 초등학교 2학년 때 하늘나라로 떠났다. 엄마는 닥치는 대로 일을 하며 정신 지체가 있는 큰딸과 막내딸을 키웠다. 엄마의 치열한 후원을 입고서 2002년 말 소영은 한국예술종합학교 작곡과 입시에 떨어졌다. 지금도 그녀는 실력도 실력이지만 장애인이기 때문이라고 믿고 있다.


재수생 시각장애 여학생은 툭하면 화를 내고 가출했다. 2003년 엄마가 하던 사업이 망했다. 몸도 정신도 피폐했고 생계는 극도로 어려워졌다. 그해 여름 엄마는 두 딸과 함께 공원에 가서 쥐약 봉지를 끌렀다. “같이 죽자.” 한참 있다가 소영이 말했다. “안 죽으면 안 돼, 엄마?” 세 여자가 부둥켜안고 울었다.


“그날 이후 세상을 긍정적으로 보기로 다짐했다. ‘할 수 없다’가 아니라 ‘할 수 있다’고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그녀가 말했다. 죽도록 공부했다. 그래서 2005년 한국예술종합학교 지휘과에 합격했다. 수석이었다. 4년 장학금을 받게 된 것도 희망의 일부였다. 하지만 작곡과 쪽으로는 쳐다보지도 않고, 수업을 듣지도 않는다고 했다. 패배감과 좌절은 그리 진하다.


이소영은 인천에서 서울에 있는 학교까지 전철 두 번, 버스 한번을 갈아타고 통학을 했다. 학교에 가면 악보를 ‘봐야’ 하는데, 악보에 코를 박고 음정을 외우고 음표를 외웠다. 외운다고? “힘들긴 하지만, 안 외우면 안 되니까.”

더 악화된 눈


2006년 가을 학기에 그녀는 결국 지휘과에서 성악과로 전공을 바꿨다. 피아노를 치고 싶고, 노래를 하고 싶고, 그래서 그 둘을 함께 할 수 있는 지휘과에 지원했지만, 악보를 많이 봐야 하는 지휘과 수업이 그녀에겐 벅찼다. 그래서 그녀는 노래를 택했다. 2007년 서울 강남구가 주최한 신년음악회에 초청됐다. 소영은 학생으로는 최초로 예술의전당 무대에 섰다. 성악가로서, 그녀는 만당을 이룬 관객들 앞에서 ‘그리운 금강산’과 ‘산촌’을 불렀다.


2008년 희망을 품고 살던 그녀에게 또 불행이 닥쳤다. 가을부터 눈이 악화되더니 아예 보이지가 않았다. 결국 2009년 한 학기를 휴학하고 수술을 네 차례나 받았다. 하지만 회복 불가능. 나라에서는 소영에게 활동도우미를 붙여줬다. 통학은 도우미 도움을 받고, 집에서는 “그럭저럭 잘 산다”고 했다. 하지만 책을 전혀 읽을 수 없으니 난감하다.


“악보는 대개 일일이 음반을 찾아서 들어서 외운다. 교수님들이 화이트보드에 적는 강의? 이건 절대 못 받아 적는다. 방안이 없다.” 이소영은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하나밖에 없는 장애인이다. 전례 없는 사태에 학교는 그녀 말을 빌면, “눈에 보일 정도로” 이러구러한 배려를 하는 중이다. 그럼에도 이소영은 성적을 유지해서 4년 내내 장학금을 받고 다녔다.

2007 신년음악회(예술의 전당)

타인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수술 후유증이 가시고, 그녀는 지난여름 베트남에 공연을 다녀왔다. 현지에 진출해 있는 벽산건설이 초청했다. 여러 노래를 부르고, 여러 곡을 연주했다. 호치민 음악방송이 그녀를 따로 불러 방송에도 나왔다. “그 방송사 간부가 ‘감동했다’며 꽃다발을 줬는데, 검역에 걸려서 못 가지고 왔다.” 법이 그런 건 알지만, 은근히 속이 상한다고 했다. 25일에는 서울 향림교회에서 또 연주회가 있다.

그녀가 미래를 말한다. “음악치료사가 될 거다.”교수님들 제안을 따라 미국으로 유학을 갈 지, 아니면 국내 대학원을 갈지는 고민 중이다. “콩쿠르 입상도 없고, 이제 막 성악을 시작한 학생이다. 지금까지는 장애인이니까 성공한 거 같다. 있지 않은가. ‘인간 승리’ 따위의. 음악치료사가 되어도 그런 말은 붙어 다닐 게 틀림없다. 하지만 상관없다. 나는 노력을 해서 여기까지 왔으니까, 앞으로도 내 노력으로 내 꿈을 이룰 거다.”


자, 선천적 시각장애를 가지고 태어나, 눈 없는 대신에 귀가 있어서 소리를 사랑하는 능력을 소유하게 된 젊은 여자가 있다. 그 여자가 음악학교에 들어가 작곡을 공부했고, 성악을 공부했다. 걸어온 길도 대단하거니와, 타인의 아픔을 치유하는 힐러(Healer)의 삶을 그녀가 살아가려 하니 이 또한 대단하다. 그녀의 이름은 이소영이다.

나는 눈이 없는 게 아니다 나는 귀가 있는 것이다
이소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