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09.09.24 03:10
증오와 의심, 알고 보니 사랑이었네
붕붕거리는 소리가 오래 귓바퀴에 맴돌았다. 《밤으로의 긴 여로》(연출 임영웅)에서 안갯속에 울려대던 경보음, 무적(霧笛) 소리다. 이 연극은 바닷가 별장에 모인 한 가족의 심리를 내시경처럼 들여다본다. 등장인물들은 몸을 숨겨주는 안개와 몸을 들추는 무적 소리 사이에서 명멸했다. 행복했던 지난날과 불행한 오늘, 사랑과 증오, 웃음과 파열음이 한 덩어리로 밀려왔다.
어머니 메어리(손숙)는 현실이 고통스러울 때마다 마약에 취해 과거로 간다. 배우 출신인 아버지 타이런(김명수)은 병원비도 아까워하는 구두쇠다. 맏아들 제이미(최광일)는 자포자기한 술주정뱅이고, 둘째 에드먼드(김석훈)는 폐병(결핵)에 걸려 있다. 이들은 의심과 증오로 으르렁대고 술에 취해 비틀거린다.
"날 두고 다들 떠나는군요."(메어리)
"우릴 두고 떠나는 사람은 당신이오."(타이런)
부부가 나누는 이 대화는 이 연극을 통째로 설명해준다. 어릴 적 수녀나 피아니스트를 꿈꿨던 메어리는 안개와 몽상, 과거를 향해 멀어져가고 현실적인 타이런은 그녀를 붙잡고 경고하고 또 체념한다. 제이미와 에드먼드는 비관적이다.
이 정통 드라마는 인터미션 전까지 1~2막의 템포가 느렸다. 사건은 심리적인 공간에서 펼쳐지고 대사가 많았다. 하지만 적응하고 이 드라마에 올라탄 관객에게 3~4막은 안개처럼 스며들었다. 그들에게도 가족이 있고 갈등과 상처, 눈물과 연민은 정서적으로 친숙한 소재였다.
이번 《밤으로의 긴 여로》는 이해랑 서거 20주기 추모 무대다. 첫날 공연에서는 그 부담이 느껴졌다. 손숙은 '지금 여기 있으면서도 없는 연기'를 해내야 했다. 메어리의 감정 진폭을 잘 견뎌냈지만 무르익을 시간이 필요해 보였다. 김명수의 몰입은 힘이 셌다. "불을 모두 켜라. 돈을 태우자. 빌어먹을. 종점은 양로원이다!" 등 몇몇 대사는 객석에 웃음을 줬다. 최광일·김석훈·서은경은 안정적으로 극을 떠받쳤다.
이 공연장은 공기가 달랐다. 배우들의 호연이 안개와 무적 소리, 어둠 속에 출렁이는 음악, 무대와 어울리며 드라마의 밀도를 높였다. "묵은 슬픔을 눈물과 피로 썼다"는 극작가 유진 오닐의 고백답게 헝클어진 가족사지만 제이미의 대사처럼 "미움보다 큰 사랑의 힘"이 전해졌다. 마지막 장면, 메어리가 웨딩드레스를 들고 등장하고 등대 불빛이 무대를 훑을 땐 가슴이 서늘했다. 환청처럼 또 무적 소리가 들려왔다. "뿌우웅 뿌우웅…."
▶10월 11일까지 서울 명동예술극장. 1644-2003
어머니 메어리(손숙)는 현실이 고통스러울 때마다 마약에 취해 과거로 간다. 배우 출신인 아버지 타이런(김명수)은 병원비도 아까워하는 구두쇠다. 맏아들 제이미(최광일)는 자포자기한 술주정뱅이고, 둘째 에드먼드(김석훈)는 폐병(결핵)에 걸려 있다. 이들은 의심과 증오로 으르렁대고 술에 취해 비틀거린다.
"날 두고 다들 떠나는군요."(메어리)
"우릴 두고 떠나는 사람은 당신이오."(타이런)
부부가 나누는 이 대화는 이 연극을 통째로 설명해준다. 어릴 적 수녀나 피아니스트를 꿈꿨던 메어리는 안개와 몽상, 과거를 향해 멀어져가고 현실적인 타이런은 그녀를 붙잡고 경고하고 또 체념한다. 제이미와 에드먼드는 비관적이다.
이 정통 드라마는 인터미션 전까지 1~2막의 템포가 느렸다. 사건은 심리적인 공간에서 펼쳐지고 대사가 많았다. 하지만 적응하고 이 드라마에 올라탄 관객에게 3~4막은 안개처럼 스며들었다. 그들에게도 가족이 있고 갈등과 상처, 눈물과 연민은 정서적으로 친숙한 소재였다.
이번 《밤으로의 긴 여로》는 이해랑 서거 20주기 추모 무대다. 첫날 공연에서는 그 부담이 느껴졌다. 손숙은 '지금 여기 있으면서도 없는 연기'를 해내야 했다. 메어리의 감정 진폭을 잘 견뎌냈지만 무르익을 시간이 필요해 보였다. 김명수의 몰입은 힘이 셌다. "불을 모두 켜라. 돈을 태우자. 빌어먹을. 종점은 양로원이다!" 등 몇몇 대사는 객석에 웃음을 줬다. 최광일·김석훈·서은경은 안정적으로 극을 떠받쳤다.
이 공연장은 공기가 달랐다. 배우들의 호연이 안개와 무적 소리, 어둠 속에 출렁이는 음악, 무대와 어울리며 드라마의 밀도를 높였다. "묵은 슬픔을 눈물과 피로 썼다"는 극작가 유진 오닐의 고백답게 헝클어진 가족사지만 제이미의 대사처럼 "미움보다 큰 사랑의 힘"이 전해졌다. 마지막 장면, 메어리가 웨딩드레스를 들고 등장하고 등대 불빛이 무대를 훑을 땐 가슴이 서늘했다. 환청처럼 또 무적 소리가 들려왔다. "뿌우웅 뿌우웅…."
▶10월 11일까지 서울 명동예술극장. 1644-20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