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섭 아저씨, 혼저옵써(어서 오세요)"

  • 서귀포=손정미 기자
  • 오재용 기자

입력 : 2009.09.17 02:51

서귀포는 '이중섭 축제' 중
생일 4월10일→ 9월16일 학적부 통해 바로 잡아…
서귀포시 예산 지원으로 미술관서 원화 2점 구입 '이중섭 세미나'도 성황

"중섭 아저씨에게/ 이제는 초가 마당에 막걸리가 있고 옥돔을 구워놓고/ 오늘도 혼저옵써예(어서 오세요)/ 초가 할머니도, 할머니 딸도 쌀밥을 해서 드리려 합니다/ 이제는 배 고프지 마세요."(서귀포 시민)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가 한국을 대표하는 천재화가 이중섭(李仲燮·1916~1956)을 기리는 축제로 들떠 있다. 16일 '이중섭 예술제'가 시작된 서귀포시 서귀동 이중섭 미술관과 그 앞 이중섭 거주지에 조성된 이중섭 공원에는 이곳에서 어려운 환경에서도 예술혼을 불태웠던 위대한 화가를 그리워하는 편지들이 바람에 날리고 있었다. 이중섭 예술제를 맞아 이 화백에게 전하고 싶은 편지를 써서 걸게 했고 이날 하루만 300여통이 걸렸다. 글을 남긴 사람들은 이중섭을 '삼촌' '아저씨'라 부르며 애틋한 그리움을 나타냈다.

‘이중섭과 서귀포’세미나 참가자들이 16일 이중섭미술관 앞마당에 설치된 이중섭 얼굴 조각상 앞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다. 왼쪽부터 박영택 경기대 교수, 이중섭 화백의 조카 이영진씨, 박명자 갤러리현대 사장, 임영방·류희영 이중섭미술상 운영위원, 김문순 조선일보 발행인, 최경한·이종상 이중섭미술상 운영위원./이종현 객원기자 grapher@chosun.com

'이중섭 예술제'를 맞아 한국예총 서귀포지부 회원들은 3개월에 걸쳐 이중섭의 가족을 한지(韓紙)로 형상화한 조형물을 만들었고 학생들은 이중섭을 주제로 한 그림을 그려서 이중섭 미술관과 이중섭 공원에 전시했다. 한국예총 서귀포지부 이연심 지부장은 "이중섭 화백이 머물렀던 고장에 산다는 것만으로도 큰 자부심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이중섭은 평남 평원군 조운면 송천리에서 태어났지만 6·25 전쟁 때인 1951년 초 서귀포로 내려와 그해 말까지 지냈다. 혹독한 가난으로 게를 잡아먹어야 했지만 가족과 나눈 마지막 행복한 시간이었다.

서귀포시는 이중섭과의 소중한 인연을 놓치지 않고 1998년 이중섭 거리를 조성했고, '이중섭 예술제'를 시작했다. 2004년에는 이중섭 미술관을 세웠고 그 취지에 공감한 갤러리현대 박명자 사장과 가나아트 이호재 회장이 이중섭의 작품 9점을 기증했다.

올해 이중섭 예술제는 특별한 의미를 지니게 됐다. 그동안 4월 10일이라고 알려졌던 이중섭의 생일이 최근 조사를 통해 이번 예술제 개막일인 9월 16일로 밝혀졌기 때문이다. 이중섭 미술관의 전은자 학예사는 "이중섭 선생이 일본에서 유학했던 제국미술학교(현재 무사시노 미술대학) 학적부를 통해서 태어나신 날이 9월 16일임을 확인했다"며 "지금까지는 이중섭 선생의 평양 종로보통학교와 일본 문화학원 동창이었던 재미화가 김병기 화백의 생일(4월 10일)이 잘못 전해졌다"고 밝혔다. 이중섭은 1935년 일본 제국미술학교서양화과에 입학했다 중퇴한 뒤, 문화학원에 입학했다.

이중섭 미술관도 올해 큰 경사를 맞았다. 서귀포시의 지원으로 10억원의 예산을 확보해 '꽃과 아이들'과 '선착장을 내려다본 풍경' 등 두 점의 이중섭 작품을 개관 이후 처음으로 구입한 것이다. 이중섭 미술관은 "지역 미술관이 이만한 예산을 확보하기란 결코 쉽지 않다"면서 "서귀포시와 시민, 그리고 이중섭을 사랑하는 모든 분들의 성원 덕분"이라고 말했다.

이중섭 미술관이 최근 구입한 이중섭의 '선착장을 내려다본 풍경'(왼쪽)과 '꽃과 아 이들'./서귀포시 제공
이날 이중섭 미술관을 찾았다가 이중섭의 새 작품을 만난 관람객들은 반가움을 나타냈다. 이영숙(62·경기도 과천)씨는 "몇 년 전 미술관에 처음 왔을 때 이 화백의 작품 원화가 많지 않아 서운했다"면서 "이 화백이 직접 그린 작품이 늘어나는 것을 보니 기쁘다"고 말했다. 이유순(60·서귀포시 서귀동)씨는 "이중섭 미술관이 이 화백의 작품을 구입한 것은 서귀포의 자존심을 높이는 계기가 됐다"며 "더 많은 작품을 구입해 '이중섭' 하면 서귀포시를 떠올릴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개관 당시 이중섭 작품 원화를 기증했던 박명자 갤러리현대 사장은 "미술관이 자체적으로 이중섭 선생의 작품을 구입한 걸 보니 내가 부자가 된 기분"이라며 기뻐했다.

한편 이날 서귀포 KAL호텔에서는 조선일보사와 서귀포시가 공동주최한 '이중섭과 서귀포' 세미나가 열렸다. 올해 12회째를 맞은 이 세미나에서 박영택 경기대 교수는 '이중섭 그림에 반영된 가족 이미지'란 제목의 주제 발표를 통해 "이 화백이 남긴 그림에는 세상을 떠나는 순간까지 가족과의 만남을 염원하고 기다린 작가의 고독한 삶과 고통이 배어 있고 그가 그린 가족그림은 가족과 다시 만나려는 염원이 담겨 있다"며 "하지만 그의 그림은 또한 일제강점기 이래 우리 민족이 겪은 수난과 비극을 극복하려는 표현으로도 볼 수 있다"고 말했다.

또 '21세기 뮤지엄의 진화'란 주제로 발표한 최병식 경희대 교수는 "전 세계 뮤지엄들은 이제 경영전략을 수립해 더 좋은 작품을 수집하고 많은 사람에게 문턱을 낮출 방법을 고민하고 있다"며 "수많은 뮤지엄을 갖고 있는 제주도도 새로운 패러다임을 과감히 받아들인 선진국 뮤지엄들을 본받을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이날 세미나에는 이중섭 화백의 조카 이영진씨, 임영방·최경한·이종상·류희영 이중섭 미술상 운영위원, 박명자 갤러리현대 사장, 이연심 한국예총 서귀포지부장, 이상복 제주특별자치도 행정부지사, 박영부 서귀포시장, 오광협 전 서귀포시장, 김문순 조선일보사 발행인 등 각계 인사 100여명이 참석했다.

박영부 서귀포 시장은 인사말에서 "그동안 서귀포시를 이중섭 예술을 집대성하는 곳으로 만들기 위해 펼쳐온 노력을 앞으로 더욱 강화하겠다"고 말했다. 김문순 조선일보 발행인은 "일찍이 '이중섭 미술상'을 제정했던 조선일보는 앞으로도 예술가들을 소중히 여기고 후원하는 데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