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09.09.12 03:12

9일 서울시 마포구 서교동의 공연장 브이홀. “딱딱딱딱” 드럼 스틱이 네 번 울리자 전자 기타와 키보드, 베이스 기타가 일제히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멤버들은 락밴드 특유의 헤드뱅잉(머리돌리는 퍼포먼스)이나 샤우팅 창법 대신에 무릎을 살짝살짝 굽혀가며 박자를 맞췄다. 노래가 “내리는 빗방울 바라보며 말없이 말없이 걸었네”라며 절정을 무리없이 넘어가자, 굳었던 멤버들의 표정에도 미소가 떠올랐다.
평균연령 66세 락밴드가 있다. 의정부 문화원에 소속된 ‘한마음 실버밴드’다. 팀에서 키보드를 치는 방순남씨는 스스로를 ‘막내’라고 했다. 하지만 올해 63세다. 기타를 치는 유미희씨는 64세이고, 드럼을 치는 제성자씨도 내년이면 종심(從心·70세)이다. 그래도 맏언니이자 보컬을 맡고 있는 손영자(74)에 비하면 젊은 셈이다.

멤버들이 전원 고령이지만, ‘한마음 밴드’는 요즘 잘나가는 ‘윤도현 밴드’나 ‘FT아일랜드’가 부럽지 않다. 2006년 처음 만들어진 뒤로 그들을 찾는 무대가 ‘의정부 회룡문화제’를 비롯해 지금까지 22번이나 있었기 때문이다. 지역에서 인기를 얻은 터라, 매달 한 번씩 열리는 오디션에는 5~6명의 신입 지원자가 찾아온다. 그렇게 모여 현재 활동하는 단원만 해도 모두 17명. 밴드 3개를 꾸려도 될 만큼 모였다.
한마음 밴드는 지난 2006년 처음 결성됐다. 실제로 락 그룹에서 활동하고 있는 한정호(36·The Play 소속)씨가 밴드의 선생님을 맡아 지금까지 꾸리고 있다. 한씨는 “처음에 어르신들이 찢어진 청바지를 입고 산울림이나 시나위 같은 밴드를 하면 재미있을 거 같아서 시작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한씨의 생각은 금세 벽에 부딪혔다. 한씨는 ‘크라잉넛’의 ‘매직서커스유랑단’ 같은 노래를 밴드에게 가르치고 싶었지만, 할머니·할아버지들에게는 ‘송골매’의 ‘어쩌다 마주친 그대’도 낯설었다. 또 한마음 밴드의 멤버들은 1명을 빼놓고는 이전에 악기를 배워본 적이 전혀 없었다. 한씨는 “어르신들이 음의 길이를 잘게 쪼개는 것을 이해하시기 힘들어 하셨기 때문에 ‘16분 음표’라는 개념을 설명하기도 힘들었다”고 했다.
결국 한씨는 자신이 꿈꾼 밴드 대신에, ‘어르신들이 꿈을 실현하는 밴드’를 선택했다. 정통 락 음악 대신에 트로트를 선곡했고, 연주하기 쉽도록 곡마다 일일이 편곡을 했다.
한마음 밴드의 ‘늦깎이 락커’들도 열정을 보였다. 4개월 전에 밴드에 들어와 전자 기타를 치고 있는 유미희씨는 왼손가락 끝부분에 굳은 살이 박히도록 연습을 했다. 일주일에 2번, 2시간씩 문화원에서 하는 연습만으로는 부족하다 싶어 기타를 구입해 집에서도 매일 한시간씩 연습을 하고 있다. 유씨는 “젊었을 때부터 하고 싶던 음악에 대한 꿈을 이제야 이뤄서 연습이 아주 즐겁다”고 말했다. 드럼을 연주하는 제성자씨도 2시간을 내리 두드려야 하는 드럼 연습이 “공부를 잘하든 못하든 학교 가는 게 마냥 좋았던 어린 시절의 딱 그 심정”이라고 했다.
밴드 멤버들의 열정이 크다보니 한마음 밴드는 방학이 없다. 한씨는 “지원금이 나오지 않는 달에 방학을 하려 했더니, 어르신들이 술 사가지고 찾아와서 ‘연습하고 싶다’고 하셨다”며 “하나를 배우면 금방 실증내는 젊은 세대와는 확실히 다른 모습”이라고 말했다. 또 밴드를 가르치는 한씨에 대한 멤버들의 마음도 각별했다. 아들뻘인 한씨가 연습실에 들어오면 60~70대 멤버들이 ‘선생님 오셨다’며 자리에서 일어날 정도라고 했다.
그렇게 연습을 하다보니 ‘늦깎이 락커들’의 삶에도 변화가 찾아왔다. 베이스 기타를 치는 김갑선씨는 음악하는 재미로 문화원에 다니다가 다이어트 효과를 봤다. 김씨는 “밴드하기 전에는 48인치이던 허리가 지금은 36인치로 줄었다”며 “(밴드) 배우려고 1시간 30분씩 걸려 문화원을 찾아다닌 덕택”이라고 했다. 키보드를 맡은 방순남씨도 “건반에서 ‘도레미’ 누르는 것부터 시작한 실력이 어느새 두 손으로 칠 수 있을 만큼 늘었다”며 “새로운 활력소와 흥이 생겼다”고 말했다.
노년층으로 구성된 밴드였지만, ‘늦깎이 락커’들은 누구하나 어려움을 호소하지 않는다. ‘공연장에서 조명이 깜빡일 때는 악보가 잘 보이지 않는다’ 정도가 가장 큰 어려움이다. 또한 ‘라이벌을 세우고 경쟁해서 이기겠다’는 마음도 없다. “박수를 쳐주시면 더 즐겁게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러니 박수 많이 쳐주세요”라는 손영자씨의 말처럼 ‘더 즐거워지는 것’이 목표다.
한씨의 소원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어르신들이 이 밴드를 오래오래 하셨으면 좋겠어요. 그렇게 하려면 아프시지 않고 건강하게 오래 사셔야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