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09.09.11 03:15 | 수정 : 2009.09.11 08:34
전국대회 휩쓰는 장호원中 '햇사레 관악부'
영화 '꽃피는 봄이 오면'모델이 된 관악부원이 4년전 음악교사로 부임
악기 빌려 8명으로 창단 영화처럼 전국대회 우승
지난 7일 오후 4시 경기도 이천시 장호원읍 노탑리 장호원중학교 4층 체력단련실. 연습에 열중해 있는 이 학교 햇사레 관악부는 지난달 25일 대한민국관악연맹과 안동대학교가 공동주최한 전국 초·중·고 관악합주경연대회에서 중등부 최우수상을 받은 팀이다. 경기도 맨 끝자락이자 인구 1만6000여명(장호원읍)의 농촌지역 학생들이 빛바랜 중고 악기들을 들고 나가 새 악기로 멋을 낸 도시 학생들을 제치고 정상에 올라선 것이다. '천둥소리'는 '고대 영웅의 전설(Legend of The Ancient Hero)'과 함께 햇사레 관악부의 대회 연주곡이다. 박 교사는 "두 곡의 악보가 국내에 없어 외국에서 수입해 왔다"고 말했다.
이틀 뒤인 지난달 27일엔 춘천시와 한국관악협회가 공동주최한 춘천전국관악경연대회에서도 중등부 최우수상을 탔다. 작년 전국 대회에서 금상과 최우수상을 받은 데 이어, 올해 개최된 전국대회 2곳에서 모두 중등부 1위를 휩쓴 것이다.

◆악기 빌려 8명으로 관악부 창단
햇사레 관악부는 교과특기자 육성사업의 하나로 2005년 창단됐다. 박 교사는 인근 장호원리 부원고등학교 관악부에서 강사로 일하다 창단과 함께 자리를 옮겼다. 강원도 삼척시 도계읍이 고향인 박 교사는 영화 '꽃피는 봄이 오면'(2004)의 소재인 도계중 관악부 창단 멤버다. 영화는 강성원 음악교사를 시작으로 3명의 교사가 관악부를 이끌며 전국대회 11년 연속 금상을 받은 도계중 관악부 이야기를 다뤘다.
햇사레 관악부는 단원 8명으로 시작했다. 창단 당시만 해도 학교와 학생들 반응은 썰렁했다. 더 뽑고 싶어도 악기가 없었다. 클라리넷, 트럼펫, 트롬본을 1개씩 샀다. 또 부원고에서 클라리넷 2개, 트럼펫 1개, 트롬본 2개를 빌려왔다. "안 돌려주고 있으니까 빌렸다기보다 얻어온 거죠. 협주는 꿈도 못 꾸고 악기 연습만 하는 정도였죠."
그해 졸업식, 박 교사는 후배 2명에게서 튜바와 호른을 빌려 '금관 5중주'를 꾸렸다. 애국가와 '국기에 대한 경례', 교가를 연주했다. 2006년 입학식 때도 악기를 들었다. 박 교사는 "이때부터 비로소 관악부 존재가 인식되기 시작했다"고 했다.
2006년 초 부원고에서 악기 10여개를 더 빌리고, 교육청 지원금으로 튜바·호른·스네어 드럼 등 새 악기를 구입해 관악부원을 32명으로 늘렸다. 8월 처음 출전한 외부 대회인 이천시 학생예능경연대회에서 합주부문 대상을 받으며 화려한 신고식을 치렀고, 올해까지 4년 연속 대상을 탔다.
◆"비 오는 날 천막 치고 연습했어요"
올해 안동 대회에서 심사위원장을 맡은 강원대 이한돈 교수는 "호흡과 리듬 모두 우수해 어려운 곡들을 잘 소화했다"며 "고·중·저음의 밸런스가 잘 맞아 좋은 평가를 받았다"고 말했다. 관악연맹 신병기 사무차장은 "교체할 악기가 많아 보였는데 웬만한 고등학교 팀보다 수준 높은 연주를 선보여 대회 운영진이 '역시 장호원이다'라며 칭찬했다"고 했다.
46명의 관악단원은 매일 오후 4시 연습을 위해 '체력단련실'에 모인다. 관악부 전용 연습실이 없어서다. 하지만 체력단련실은 방음시설이 없어 소리가 울리는 탓에 음을 제대로 구분할 수 없었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야외 연습'이었다. 악장(樂長) 박진주(15)양은 "1~2학년 때 대회를 준비할 땐 악기를 들고 학교 테니스장에 나갔어요. 비가 올 때는 천막 서너 개를 치고 천막 사이로 새는 비를 피해가며 악기를 불었어요. 트럼펫을 부는 사람은 한 손으로 우산을 받쳐 들고 연습했죠"라고 말했다.
학교측은 대회를 3개월 앞둔 지난 5월에야 체력단련실 내벽을 방음재로 교체해줬다. 여름방학에도 학생들은 대회 준비를 위해 매일 학교에 나왔다. 연습시간은 오전 10시~오후 2시. 늦은 아침식사를 마치고 점심때를 훌쩍 넘기지 않기 위해 잡은 시간이다. "점심을 주고 싶었는데…. 그럴듯한 간식 한 번 제대로 못 줬습니다."
◆개인 악기는 꿈도 못꿔
단원 중 개인 악기를 가진 학생은 진주가 유일하다. 진주는 지난달 서울대 음대가 주최한 관악실기 경연대회에 관악부용 플라스틱 클라리넷을 들고 출전했다. "대회장에 같이 간 아빠가 충격을 받아 큰 마음 먹고 목관 클라리넷을 사주셨어요."
3학년 태진(15·가명)이가 부는 트롬본은 부원고에서 얻어온 것이다. 손이 많이 가는 슬라이드 부분은 옐로 래커가 벗겨져 하얗게 닳았다. 태진이는 낡은 악기라도 불고 싶었지만, 이혼으로 혼자가 된 어머니는 관악부 활동을 반대했다. 급기야 지난 3월 초에는 4일 동안 '가출 투쟁'을 벌인 끝에 어머니로부터 관악부 활동을 허락받았다.
오후 6시, 연습을 마친 큰북 미선(14·가명)이는 "집에 빨리 가서 설거지하고 빨래하고 초등생 동생을 돌봐야 해요"라며 급하게 악기를 정리했다. 미선이는 지난 6월 교통사고로 아버지를 잃었고, 어머니는 식당일을 시작했다.
박 교사는 "가정 형편이 안 좋은 아이들이 많지만, 순수한 마음과 열정이 음악도 순수하게 만드는 것 같다"며 "연습시간이 끝나도 매일 남아 연습하고 주말도 반납하며 악기에 매달리는 아이들 스스로 실력을 키운 덕에 좋은 결과가 나타났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