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식 ABC] 걸작 혹평했다가… 혹평당한 평론가들

  • 김성현 기자

입력 : 2009.09.10 02:37

차이콥스키와 브람스의 곡에 대해 칼날 선 독설을 퍼부었지만, 결국은 실수로 판정난 비평가들. 에두아르트 한슬리크와 버나드쇼(왼쪽부터).
첫선을 보일 당시에는 혹평으로 뒤범벅됐지만 이제는 오롯이 음악사의 걸작으로 남아 있는 작품들이 적지 않습니다. 최근 영국의 음악전문지 '그라모폰(Gramophone)'이 걸작을 몰라보고 독설을 퍼부었던 평론가들의 대표적 실수 10가지를 뽑았습니다.

"차이콥스키의 바이올린 협주곡은 귀에 악취를 풍기는 음악도 존재할 수 있다는 섬뜩한 생각을 처음으로 우리에게 선사한다."

1881년 오스트리아 빈에서 이 협주곡이 초연된 직후에 나온 평입니다. 현재는 1년 365일 연주회장에서 들을 수 있는 명곡도 당시엔 푸대접을 면하지 못했습니다. 차이콥스키가 곡을 헌정하려고 했던 당대의 바이올리니스트 레오폴트 아우어(Auer)마저 난색을 표했으니, 굳이 흠을 잡자면 혹평의 여지가 없는 건 아닙니다.

이 비평을 쏟아부었던 당사자가 당시 유럽 최고의 평론가이자 음악미학의 선구자로 꼽히는 에두아르트 한슬리크(Hanslick)라는 점도 흥미롭습니다. 브람스의 편에서 리스트와 바그너에게 맹공을 퍼부었던 주역으로, 그의 대표적 저작인 《음악적 아름다움에 대하여》는 국내에 소개됐지요. 하지만 차이콥스키의 걸작 협주곡이 지닌 진가를 몰랐던 한슬리크의 비평은 '최악의 실수' 1위로 꼽혔습니다.

"세상에는 두 번이나 해서는 안 될 희생이 있다. 그 가운데 하나가 브람스의 〈레퀴엠〉을 듣는 것이다."

갑남을녀(甲男乙女)나 장삼이사(張三李四)의 평이라면 웃고 지나치겠지만,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극작가 버나드 쇼(Shaw)의 말이라면 사정이 다릅니다. 쇼는 음악에도 조예가 깊어 바그너의 4부작 음악극 《니벨룽겐의 반지》에 대한 해설서를 쓰기도 했지요. 한슬리크와는 정반대로, 바그너의 열렬한 팬이었던 쇼는 반대편에 있던 브람스의 〈독일 레퀴엠〉에 대해 짜디짠 평가를 내렸지요. 당파성에 기울어 객관성을 잃고 말았던 쇼의 악평이 2위에 올랐습니다.

"4악장은 기괴하고 무미건조하다. 쉴러의 〈환희의 송가〉에 대한 이해도 너무나 조잡해서 베토벤 같은 천재가 이런 곡을 어떻게 쓸 수 있었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

베토벤의 마지막 교향곡 〈합창〉에 대한 이 냉혹한 비평은 루이스 슈포어의 자서전에 실려 있습니다. 슈포어는 14세 연상의 베토벤과 친분을 유지했으며, 작곡가이자 지휘자로 활동했지요. 하지만 음악계의 대선배가 남긴 불멸의 걸작을 몰라본 죄로 3위에 등재됐습니다.

모든 평론가는 오이디푸스 왕의 비극적 운명을 미리 알아차린 예언자 테이레시아스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하지만 트로이의 멸망을 예언하고서도 정작 누구의 믿음도 얻지 못했던 카산드라의 슬픈 운명을 지니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당대의 판단은 역사적 평가와 얼마든지 다를 수 있다는 점에서 오판이나 오심은 불가피한 것이기도 합니다. "지혜가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할 때 지혜롭다는 것은 고통일 뿐"이라는 테이레시아스의 말은 정확히 평론가들에게 해당하는지도 모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