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서극(徐克)의 경극, 특급 태풍은 아니었네

  • 박돈규 기자

입력 : 2009.09.07 03:19

세계 국립극장 페스티벌 개막작 '태풍'

"쏴아 쏴아." 파도 소리가 밀려왔다. 무대에 펼쳐진 영상에는 번개가 내리쳤고 상형문자들이 일렁였다. 검고 험악한 파도와 물거품 같은 문자들을 대비시켰다. 어느 순간 경극(京劇) 발성으로 극장에 차오르는 노래. "사나운 풍랑으로/ 선과 악을 쓸어버려라/ 비바람을 일으켜/ 속세의 더러움을 씻어내라…."

'제3회 세계 국립극장 페스티벌' 개막작으로 대만 당대전기극장(當代傳奇劇場)이 공연한 경극 《태풍》은 폭풍 장면으로 무대를 열었다. 4m가 넘는 큰 키와 붉은 의상으로 힘을 상징하는 주인공 프로스페로 앞에서 나폴리 국왕 알론조가 탄 배는 당장 부서질 것처럼 흔들린다. 긴 옷을 좌우로 늘어뜨려 배를 표현하는 방식은 전통 경극에 비해 현대적이었다. 2007년 《고도를 기다리며》로 내한했던 당대전기극장은 서양고전을 경극의 틀에 담아내는 작업을 해왔다.

셰익스피어가 쓴 《태풍》은 나라를 빼앗긴 프로스페로가 복수의 기회를 잡지만 딸 미란다가 원수의 아들과 사랑에 빠지면서 모두를 용서하게 된다는 이야기다. 《황비홍》의 영화감독 쉬커(徐克)가 연출한 이 경극에는 동양과 서양, 전통과 현대가 뒤섞여 있었다. 중국과 대만의 관계를 빗댄 듯한 풍자도 흥미로웠다.

대만 당대전기극장이 제3회 세계 국립극장 페스티벌 개막작으로 공연한 경극《태 풍》. /국립극장 제공

한국 관객에게 《태풍》은 이야기도 형식도 좀 낯설었다. 원작의 대사를 반 이상 들어내고 시적인 노래로 표현한 데 따른 부담도 있었다. 천 위로 상형문자들이 흘러가는 효과가 아름다웠지만 서극다운 역동성은 충분히 발휘되지 않았다.

하지만 경극 관객은 이야기를 듣는 게 아니라 연기를 보러 극장에 간다고 했다. 손놀림을 비롯해 양식화된 연기, 화려한 의상과 분장, 대극장을 울리며 몸에 감기는 창법, 독특한 반주(伴奏), 창검술과 곡예 등은 그 자체로 즐거운 오락이었다. 다만 소름 끼칠 정도의 완성도를 보여주지 못한 점이 아쉽다. 영화 《와호장룡》의 미술감독인 팀 윕(Yip)이 맡은 의상 디자인은 강렬하면서도 친절한 이미지를 찍어냈다. 프로스페로 역을 맡은 우싱궈(吳興國)는 첫날 공연 도중 팔을 다치는 부상에도 계속 무대에 오르는 열정을 보여줬다.

세계 국립극장 페스티벌은 프랑스 스트라스부르 국립극단의 《라 카뇨트》(9월 9~12일), 러시아 국립 크렘린 발레단의 《에스메랄다》(10월 8~10일), 한국 국립극단의 《세자매》(9월 13일까지 명동예술극장), 한국 국립무용단의 《가야》(9월 19~23일) 등으로 이어진다. (02)2280-411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