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도권II] 가평 길거리 담장엔 재즈가 흐른다

  • 김경은 기자

입력 : 2009.09.02 03:17 | 수정 : 2009.09.03 11:28

콘크리트와 벽돌로 쌓아 올린 잿빛 담장에 지난 8월 초 하얀 페인트가 말끔히 칠해졌다. 잠시 후 가벼운 운동복 차림에 앞치마와 덧소매를 낀 대학생 2~3명이 나타나 담장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까만 페인트로 밑그림을 그리고, 동그라미는 트럼펫 부는 토끼의 엉덩이로, 세모는 하늘에서 내려온 요정의 모자로 칠했다. 동네 꼬마들이 자전거를 타고 지나다가 담장에 새겨진 스케치에 할끔할끔 시선을 던졌다. 붓 칠은 지금도 계속된다.

가평군 대곡리 119소방서 옆 가평육교 아래에서‘대학생 마을벽화 공모전’에 참가한‘뮤직&’(건국대 텍스타일디자인) 팀이 콘크리트 벽에 페인트로 재즈를 형상화한 그림을 그려 넣고 있다./가평군 제공
대학생 마을벽화 공모전

가평군 가평읍 읍내리에 위치한 자라섬재즈센터는 지난 6월 홈페이지에 '자라섬 재즈시티, 대학생 마을벽화 공모전'을 연다고 밝혔다. 오는 10월15~18일 열리는 제6회 자라섬 국제재즈페스티벌을 앞두고 축제의 무대가 될 자라섬과 가평 일대 버려진 공간을 음악의 향기가 묻어나는 벽화로 채워줄 주인공들을 찾기 위해서다. "에코피아를 지향하는 재즈시티 가평에 예술이라는 가치를 입히자!"가 주제였다.

지난 7월 21일까지 전국 각지에서 응모가 빗발쳤고, 그 가운데 15개팀 38명이 뽑혔다. 개인 자격으로 참가한 한 명을 빼고 나머지는 모두 2~4명씩 팀을 꾸렸다. 합격자들을 살펴 보니 고려대(건축), 경희대(도예), 호서대(애니메이션), 한성대(패션디자인), 아주대(건축), 한국예술종합학교(조형예술), 조선대(시각정보미디어), 한양대(시각패키지), 경원대(섬유미술), 건국대(텍스타일디자인), 계원조형예술대(그래픽디자인), 세종대(패션디자인), 서울시립대(시각디자인) 등 학교도 전공도 가지각색이었다.

7월 31일 이들은 자라섬과 가평 일대를 답사하며 그림을 그릴 장소를 직접 골랐다. 유성측량설계공사 옆집, 동광건설 옆 철문, 종합운동장 정문 출입구 좌측, S-오일 주유소 우측집, 읍내7리 신용슈퍼, 가평경찰서 담장, 또와또와분식 옆집, 가평 육교 등이 앞으로 그림을 그릴 도화지였다.

본격적인 그림 그리기는 지난달 3일부터 시작됐다. 이들에겐 '에코피아―가평' '재즈도시' '음악' '축제' '자라섬국제재즈페스티벌'이란 5가지 주제와 '음악이 보이는 거리 만들기' '디자인으로 도시를 춤추게 하라!'는 2가지 과제가 주어졌다.

'대학생 마을벽화 공모전'에 참가한 '벽을 허물다(홍익대 광고커뮤니케이션디자인)'팀이 가평군 읍내리 집 담벼락에 기타 치는 연주자의 모습을 그려넣자 삭막해 보이던 거리 일대에 생기가 깃들었다. / 가평군 제공
주민들 응원이 제일 큰 힘

이후 최지연(20·대진대 제품환경디자인 1)씨는 매주 주말만 되면 친구 2명과 함께 동서울터미널에서 시외버스를 타고 가평으로 날아든다. 일본 영화 '스크랩 헤븐'에서 이름을 딴 최씨의 팀은 인터넷을 검색하다가 공모전 공고를 보고 "생각할 것도 없다"며 그 자리에서 신청했다.

이들은 해가 떠 있는 동안 읍내리 상신양복점 옆 담장 앞에 자리를 잡고 팝아트풍 벽화를 그린다. 재즈센터에서 지원받은 54만원은 페인트 15통을 사느라 벌써 다 써버렸다. 근처 밥집에서 시킨 음식을 길바닥에 펼쳐놓고 먹으며 허기를 달래고, 양복점 주인 아주머니가 "애쓴다"며 대접에 담아준 미숫가루로 목을 축인다.

힘든 건 "그림을 그리는 것 자체"라며 최씨가 웃었다. "세 명 모두 벽화를 제대로 그려본 경험이 없어요. 그러다 보니 담장이 너무 크게 느껴져요. 초등학생들이 지나가다 담장을 발로 차서 보기 싫은 발자국을 남길 땐 짜증도 나고요." 하지만 지나가던 동네 어른들이 "땡볕에 고생이 많다"며 격려해줄 땐 뿌듯함에 30도 더위마저 싹 가신다.

참가팀 중 유일하게 혼자인 '벽을 허물다'팀 이나라(22·홍익대 광고커뮤니케이션디자인 휴학)씨는 부모님과 함께 읍내리에 사는 가평군민이다. 집에서 자전거를 타고 3분만 달려가면 이씨의 작업장인 S-오일 주유소 우측 집이 나타난다.

이씨는 1주일에 세 번 이곳을 찾아 가평 출신 한국 연주자와 외국 출신 연주자가 벽을 허물고 나와 연주하면서 세대 간·문화 간 경계를 없애는 장면을 그리고 있다. 홀로 담장을 다 채워야 한다는 부담감이 있지만 외롭지는 않다. 지나가던 이들이 자신의 벽화를 보며 "잘한다! 파이팅!"이라고 외쳐주면 지쳤던 마음에 힘이 불끈 솟기 때문이다.

휴가를 맞아 자라섬 캠핑장을 찾은 신모(38·서울 문래동)씨는 "벽면과 담장 등에 재즈를 주제로 한 그림이 매우 신선하다"며 "삭막했을 거리가 정감이 간다"고 말했다.

벽화 완성은 오는 23일까지다. 가평군은 주민평가단을 꾸려 주민 호응도를 고려해 각 벽화들을 심사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시상식은 오는 10월 16일 제6회 자라섬국제재즈페스티벌 개막식 당일 열린다. 대상 1팀에게는 상금 300만원과 2009 제30회 일본 디자인페스타를 참관할 수 있는 항공·숙박·입장권이 지급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