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도권] 미술대학생 128명이 그린 개미마을 벽화

  • 곽창렬 기자

입력 : 2009.08.31 03:19 | 수정 : 2009.08.31 05:34

서대문구 벽화그리기에 5개 대학서 선뜻 참여
어둡던 마을 어느새 환하게 주민들 "학생들이 고마워"

30일 오후 서울 서대문구 홍제동 개미마을. 인왕산 등반로 입구에 자리한 이 마을 골목에 대학생 130여명이 300m 정도 길게 늘어섰다. 모두 미술을 전공하는 이들은 손에 붓을 쥐고 파란색, 빨간색, 하늘색 페인트를 묻혀 담벼락에 그림을 그려 내려갔다.

추계예술대 미술대학에 재학 중인 정수진(22)씨는 장갑을 낀 손으로 담벼락에 지름 50㎝ 정도 되는 하늘색 원을 그렸다. 정씨가 입은 주황색 티셔츠와 빨간색 추리닝 바지에 하얀색과 하늘색 페인트들이 여기저기 튀었다. 정씨는 "인왕산을 찾는 등산객과 수많은 주민이 내가 그린 그림을 본다고 생각하니 설렌다"고 말했다.

학생들이 벽화를 그린 개미마을은 서울의 대표적인 달동네 가운데 하나로, 6·25 전쟁 이후 갈 곳이 마땅치 않은 가난한 사람들이 임시 거처로 천막을 두르면서 생겨났다. 한때 하나둘씩 생기는 천막이 서부영화의 인디언 거처같이 보인다고 '인디언 촌'이라고도 불렸으나, 지난 1983년 주민들이 열심히 생활하는 모습이 개미를 연상시킨다고 해서 '개미마을'이란 정식 이름이 생겼다.

30일 오후 서울 서대문구 홍제동 개미마을에서 서울시내 미술대 학생들이 벽화를 그리고 있다. /정경열 기자 krchung@chosun.com

개미마을은 210가구 426명의 주민이 살고 있는데, 상당수는 일용직에 종사하거나 국민기초생활수급 대상자 등 형편이 어려운 사람들이 많다. 대부분 40년 이상 된 낡은 한옥 형태로, 집안으로 햇빛도 제대로 들어오지 않는 가구도 많다고 한다.

이날 벌어진 벽화 그리기는 서대문구(구청장 현동훈)와 금호건설이 마련한 '빛 그린 어울림 마을' 프로그램. 마을 주위를 아름답게 꾸미자는 취지에 성균관대(34명), 건국대(20명), 추계예대(20명), 상명대(44명), 한성대(10명) 등 5개 대학 미술전공 대학생 128명이 선뜻 참여의사를 밝혔다. 추계예술대 학생들은 지난 6월 기말고사가 끝난 직후부터 매주 1차례씩 모여 그림의 주제와 방향을 논의했고 사전답사를 통해 주민들과 협의를 하기도 했다. 주민들도 대학생들이 자신들의 담벼락을 예쁘게 꾸며준다는 제안에 손뼉을 치며 흔쾌히 동의했다.

벽화의 주제는 추계예술대 '환영', 성균관대 '가족', 상명대 '자연친화', 한성대 '영화 같은 인생', 건국대 '끝 그리고 시작' 등으로 결정됐다. 이들은 29일과 30일 이틀 동안 벽화가 그려질 150m 길이의 49가구 담벼락을 5개 구역으로 나눠 자신들이 맡은 주제에 맞춰 51가지의 그림을 그렸다.

담벼락에 있는 먼지를 털고 여기저기 끼어 있는 이끼를 뜯어낸 후 분홍색과 하늘색, 흰색 등으로 바탕색을 삼았다. 그리고 구상했던 그림 모양에 맞춰 꽃·강아지·바다·나무 등으로 동네 벽면을 채워넣었다. 어둡고 삭막했던 마을은 어느새 파스텔 톤의 밝은 빛깔로 물들어 환하게 변신했다. 성균관대 남상두씨는 "'가족'이라는 주제를 맡은 우리 대학은 원래 주민들의 얼굴과 신체부위를 그려 넣으려고 했지만 한밤중에 사람 얼굴을 보면 놀랄 수 있다는 주민들의 의견으로 꽃으로 바꾸기도 했다"고 말했다.

주민들은 이틀 만에 몰라보게 바뀐 골목 모습에 입이 벌어졌다. 오송헌(74·구멍가게 운영)씨는 "가게 주변은 낙서와 먼지가 많이 끼어 보기 싫었는데 이렇게 깔끔하게 예쁜 그림이 들어서니 앞으로 장사도 더 잘될 것 같다"며, "동네가 이렇게 많이 변한 것은 처음"이라고 말했다. 주민 김계연(54)씨는 "낡은 집들이 많아 그동안 친구나 친척을 초대하기조차 꺼렸는데, 동네 담벼락이 환하게 바뀌었으니 이제 마음 놓고 초대해도 될 것 같다"며, 연방 "그림을 그려준 학생들이 고맙다"고 했다. 등산객 김기봉(67)씨도 "30년 이상 주말이면 인왕산을 찾아 등산길에 개미마을을 지나치는데, 동네가 참 재미있어졌다"고 말했다.

캠퍼스 내 작업실을 박차고 나와 마을 벽화를 그린 학생들도 뿌듯한 표정이었다. 건국대 서정민(25)씨는 "우리가 그린 그림이 마을 인상을 바꾼다고 생각하니 신기하고 재미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