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그너가 있기에… 고통마저 즐겁다

  • 바이로이트(독일)=김성현 기자

입력 : 2009.08.27 03:45

'니벨룽겐의 반지' 산실, 독(獨) 바이로이트 축제 르포
세계서 5만여명 찾아와… 20시간 넘는 '반지 4부작'
하루 6시간씩 관람 강행군 노(老)부인 관객 실신 소동도

지난 21일 독일 남동부 바이에른주의 바이로이트시에 자리 잡은 축제 극장. 바그너(Wagner)의 4부작 오페라 《니벨룽겐의 반지》 가운데 2부 〈발퀴레〉 1막에서 서로의 정체를 알아챈 지그문트(테너 엔드릭 보트리치)와 훈딩(베이스 연광철)이 결투를 신청하며 극적 긴장감을 한껏 높이고 있었다.

이때 1층 좌석에 앉은 노부인이 고통스러운 신음 소리를 내더니 정신을 잃고 기절했다. 옆자리의 노신사는 "미안합니다(Sorry)"라고 외치고선 긴급 구조를 청하기 위해 부인을 업고 극장 밖으로 뛰어나갔다.

변변치 않은 냉방시설, 팔걸이도 없는 딱딱한 나무의자, 중간복도도 없이 최다 50여석까지 빽빽하게 들어차 있는 불편한 객석에서 하루 6시간씩 바그너의 오페라를 관람하다 보면, 이처럼 때로는 생사를 넘나드는 고행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무대 위의 지그문트와 훈딩은 잠시의 중단도 없이 결투를 신청하며 계속 노래해 갔다.

올해 독일 바이로이트 축제에서 공연된 바그너의 오페라 《니벨룽겐의 반지》가운데 3부 〈지크프리트〉에서 주인공 지크프리트(오른쪽)가 파 프너를 쓰러뜨리고 있다./바이로이트 축제 조직위 제공
관객들은 현장에서만 고통스러운 것이 아니다. 휴식 없이 2시간40분간 지속되는 1부 〈라인의 황금〉만 오후 6시에 시작한다. 2~3차례의 휴식을 포함해서 모두 6시간씩에 이르는 2~4부는 오후 4시 막이 오른다. '반지 4부작' 관객들은 나흘간 총 20시간이 넘게 바그너에 매달려야 한다. 그런데도 이 페스티벌을 찾아오는 전 세계의 '순례 행렬'은 매년 5만여명에 이른다.

바이로이트 축제의 티켓을 구하기 위해서는 세계 각지의 바그너 협회를 통해 3~4년씩 기다리는 것이 기본이다. 미국 프랭클린 앤 마셜 대학의 윌리엄 화이트셀(Whitesell) 명예교수 부부 역시 "2006년 워싱턴의 바그너 협회에 티켓을 문의한 뒤 지금껏 이 여행을 기다려왔다"고 말했다.

이처럼 마치 성지순례나 전당대회와도 같은 풍경이 지속될 수 있는 원동력은 무엇일까. 화이트셀 명예교수는 "작곡가가 자신의 작품을 공연하기 위해 직접 극장을 지은 곳도, 그 전통을 100년 넘게 이어가고 있는 곳도 세계에 유례가 없다"고 말했다.

1876년 바그너가 이 극장에서 '반지 4부작'을 무대에 올린 이후, 히틀러의 집권과 2차 세계대전의 영욕(榮辱) 속에서도 바그너 가문(家門)은 4대에 걸쳐 바그너의 오페라 10편만을 공연하는 축제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 올해는 작곡가의 두 증손녀인 에바 바그너 파스키에(Eva Wagner-Pasquier)와 카타리나 바그너(Katharina Wagner)가 축제의 총책임을 떠맡았다.

바이로이트 축제 극장만의 독특한 음향 역시 순례자들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바이올리니스트 정경화는 지난달 이 극장 뒤편을 둘러보던 중, 직접 무대에 올라가 바이올린을 들고 소리를 내보았다. 정경화는 "콘서트홀에 비해 오페라 극장에서는 보통 소리가 건조하게 들리기 마련인데, 이 극장만큼은 음향이 신비하면서도 우아하기 그지없다"고 했다.

무대와 객석을 가르는 오케스트라 피트(pit)가 이 극장은 안쪽으로 깊숙하게 들어가 있다. 오케스트라의 보면대(譜面臺)에서 나오는 빛이 차단되어 무대 위에서는 극에 몰입할 수 있다. 독일의 명장 크리스티안 틸레만이 지휘하는 오케스트라의 사운드 역시 불순물을 체에 걸러낸 보약처럼 풍성하면서도, 소리의 스멀거림까지 피부로 다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