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이코프스키가 춤춘다, 고통스럽게

  • 박돈규 기자

입력 : 2009.08.27 03:44

사랑·절망 담은 발레 '차이코프스키' '오네긴' 공연

#1

침대에 누워 있던 작곡가 차이코프스키(1840~1893)가 일어나 춤을 춘다. 고통스러운 몸부림이다. 검은 상복(喪服)을 입은 사람들이 그를 질질 끌고 다닌다. 어느 순간 무대에 차이코프스키는 둘이다. 그와 그의 분신(分身)인데 연인처럼 밀고 당긴다. 분신이 왕자와 춤출 때 차이코프스키는 울고 있다.

#2

오네긴은 지적인 바람둥이다. 1막에서 타티아나의 순정을 짓밟았던 그는 3막에서 다른 남자와 결혼한 타티아나에게 사랑편지를 건넨다. 도망치고 뿌리치는 타티아나와 붙잡는 오네긴. 작용과 반작용의 파드되(2인무)다. 타티아나는 오네긴의 눈앞에서 편지를 찢어버린다. 오네긴은 절망한다.

발레《차이코프스키》에서 점프하는 차이코프스키(블라디미르 말라코프) 뒤로 백조들이 보인다. 안무가 보리스 에이프만은“차이코프스키는 흰 백조들과 왕자 속으로 숨고 싶었을 것”이라고 했다./국립발레단 제공
드라마 발레 《차이코프스키》와 《오네긴》에 각각 등장하는 장면들이다. 국내 발레계의 투 톱인 국립발레단과 유니버설발레단(UBC)이 올가을 나란히 비극을 내놓는다. 남자 주인공이 다 사랑에 실패하는데 '차이코프스키=오네긴' 구도라 더 흥미롭다. 푸시킨의 소설에 나오는 오네긴에 대해 차이코프스키는 "나와 동일시할 수 있는 인물"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동성애

러시아 모던발레의 거장 보리스 에이프만이 안무하는 《차이코프스키》에는 〈삶과 죽음의 미스터리〉라는 부제가 달려 있다. 발레 《백조의 호수》 《호두까기 인형》으로 사랑받는 차이코프스키를 다루면서 그의 동성애와 음악, 그리고 비극에 집중한다. 차이코프스키와 그의 분신, 부인 밀류코바, 후원자 폰 멕 부인 등이 등장해 상징적이면서 표현력 강한 춤을 보여준다.

이 작품은 1993년 에이프만이 러시아에서 초연했을 때 큰 저항에 부닥쳤다. 그에게 협박 편지들이 날아왔고, 공연장에 시위대가 몰려왔다. 그러나 이후 《차이코프스키》는 남성 백조들로 채운 매튜 본의 《백조의 호수》만큼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오네긴》에서 오네긴으로 춤추는 엄재용./유니버설발레단 제공

무대에는 현실과 환상(꿈)이 교차한다. 《백조의 호수》 《잠자는 숲속의 미녀》 등의 장면들도 불려나온다. '제2의 누레예프'로 불리는 블라디미르 말라코프가 김현웅·이영철과 차이코프스키 역을 나눠 맡는다. 김주원·김지영·이동훈·김리회·박세은 등의 내면 연기를 감상할 기회다. 경기필하모닉오케스트라가 연주한다.

이성애

《오네긴》은 독일 슈투트가르트 발레단의 오늘을 일군 안무가 존 크랑코의 대표작이다. 1965년 초연했고 20세기 후반에 만들어진 가장 빛나는 드라마 발레로 꼽힌다. 드라마 발레에는 팬터마임(무언극), 그랑 파드되(남녀 솔로와 두 파드되의 조합), 디베르티스망(다양한 장식춤)이 없다. 춤과 연기가 끈끈하게 붙어 있다.

귀족청년 오네긴과 시골처녀 타티아나의 꿈 속 파드되, 여자 때문에 빚어진 오네긴과 친구의 결투, 후회와 이별의 순간이 관람 포인트다. 교향곡 5번, 〈비창〉 등을 들을 수 있는 《차이코프스키》처럼 《오네긴》도 차이코프스키 음악을 편곡해 쓴다. 오페라 《오네긴》과는 음악이 다르다. 모던한 무대와 조명도 볼거리다.

국내 발레단이 《오네긴》을 올리기는 UBC가 처음이다. 이반 질 오르테가(이탈리아)·엄재용·이현준이 오네긴으로, 강예나·황혜민·강미선이 타티아나로 춤춘다. 황혜민은 "음악만 들어도 눈물이 난다"고 했다.

▶《차이코프스키》는 9월 10~13일 서울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 《오네긴》은 9월 11~20일 LG아트센터. 1544-15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