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09.08.21 10:38

“때론 현실에서 환상에 빠질 때도 있는 거죠. … 내가 환상 아닌가? 나도 어떤 환상의 포로가 되어 버렸어. 난 그 애를 사랑해.”
위의 대사는 니나에게 향하는 마음을 주체 못하던 트리고린이, 그 때까지 애인이었던 아르까지나에게 하는 대사이다. 이 대사를 기화로 트리고린의 마음은 아르카지나라는 현실의 여인에서, 니나라는 환상의 여인으로 옮겨가고 있다. 이 선택이 비록 영원하다고는 할 수 없어도, 이 순간 트리고린에게, 니나는 영혼이고 대안이고 삶의 변화이고 그래서 지루한 자신의 일상에 충격을 가하는 주체할 수 없는 환상이 된다.
체호프의 '갈매기'에서 위의 대사는 비단 트리고린에게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니나에게 그 환상은 트리고린이면서 동시에 여배우의 삶이다. 그녀는 유명한 사람이 되고 싶다는 환상을 쫓아 트리고린을 따르고 여배우가 되고자 한다. 그런가 하면 니나는 트레블레프의 환상이었다. 트레블레프는 니나가 없는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어 결국에는 자살을 선택하고 만다. 트레블레프를 짝사랑했던 마샤에게는 거꾸로 트레블레프가 환상이었다. 마샤는 그 환상을 택할 수 없음을 알자 탐탁치 않은 남자와 결혼해야 하는 현실을 담담하게 받아들인다.
한 마디로 뭉뚱그리면 '갈매기'의 등장인물들은 환상을 쫓는 사람들이다. 하지만 트레블레프를 제외하면, 한결같이 그 환상이 영원할 수 없으며 어떤 의미에서는 존재할 수 없음을 인정하고 살아가게 된다. 트리고린은 아르까지나에게 돌아갔고, 니나는 떠나는 트리고린을 잡을 수 없고 자신이 유명 여배우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였다. 마샤는 다들 한심하게 여기는 남자와 살아보려고 노력하고 있다.

만일 이런 식으로 '갈매기'를 정리한다고 하면, 박근형에게 이 작품은 어떤 의미를 지니게 될까. 알려진 대로 박근형은 일상의 누추함을 새로운 방식으로 그려내려고 애써 온 극작가 겸 연출가이다. 그에게 일상은 환상이 틈입할 자리가 없는 누추함 그 자체였고, 어떤 의미에서 지금까지 그의 연극 문법은 철저하게 환상의 가능성을 차단하는 것에 맞추어져 있었다.
그런 박근형에게 '갈매기'가 과연 신선한 자극이 될 수 있을까. 환상없이 살 수 없는 인물들을 처리해야 할 목전의 문제를, 어떠한 방식으로든 외면할 도리가 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그들의 선택을 존중하고 마지막에 그 선택이 무너져 내리는 자리를 포착할 것인가, 아니면 처음부터 그 원초적인 가능성마저 부인할 것인가. 그가 만드는 '갈매기'의 개성과 미덕은 아마도 이 환상의 처리에 있지 않을까 싶다.
일상이 무너지는 삶의 근저로서 환상이 어떻게 자리 잡을지 자못 기대된다.
- C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