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09.07.16 03:06
시인·문화비평가 김갑수씨
37평(122㎡)의 지하공간 한복판에는 턴테이블 4개와 스피커 14조(組), 셀 수 없는 앰프들이 위용을 갖추고 있다. 한쪽 벽면에는 작곡가, 다음 벽에는 악기와 성악가, 그 너머 벽에는 재즈 음악의 순으로 가지런히 나뉘어 꽂혀 있다. "행여 찾아온 손님이 잘못 꽂으면 1년 내내 찾을 수도 없는" 음반(LP)이 3만여장, CD는 4000여장에 이른다.
구석에는 커피 볶는 냄새가 구수하다. 시인이자 방송인, 문화비평가인 김갑수씨의 작업실이다. 음악애호가인 그의 신전(神殿)이자 왕국(王國), 원고를 쓰는 사무실이면서 일상에서 탈피하는 망명지이다.
방정맞게 들어간 돈부터 물었다. "억이 두개쯤 될까"라는 대답이다. 라디오나 TV에서 듣던 나긋나긋하면서도 차분한 목소리 그대로다.
음반과 오디오, 커피까지 이 작업실을 떠받치는 삼각대의 공통점은 철저하게 취향에 관한 것이며, 시간과 돈을 마구 잡아먹는다는 점이다. 이 모든 것이 어떻게 가능했을까. 그는 "아주 간단하다. 오로지 그것만 하면 된다"며 웃었다.

"남들 다 하는 주택부금 하지 않고, 자동차 면허도 없어요. 보험·저축·부동산은 여력도 없고요." 그는 "오디오 좋아하는 사람이 혹시 친구가 많다면 겉멋이 아닌지 의심해볼 노릇이다. 납땜부터 부품 설치와 선을 잇는 결선(結線)까지 시간을 잡아먹는 일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고교 문예반 때는 무교동의 음악감상실 르네상스에 "처박혀 살았고", 대입 재수할 때는 집을 나오면서 받은 돈으로 친구의 화실에 얹혀사는 대신 첫 오디오를 장만했다. 대학 4년 내내 야학 활동을 하면서도 "서양 제국주의 음악을 좋아하는 나 자신을 표현할 길이 없어" 줄곧 답답했단다.
"다소 엉뚱하지만 '관직'을 제안받은 적이 있어요. 하지만 이 골방에 박히는 습관 때문에 저어하고 주저했지요. 저 자신도 내가 무언지 정체성에 대한 의문에 빠질 적이 있지만, 그럴 때마다 대신 '나는 음악을 듣는 사람이다'고 생각하면 적잖은 위로가 되지요."
이런 경험과 방황은 고스란히 에세이 《텔레만을 듣는 새벽에》 《지구 위의 작업실》로 묶여 나왔다. 달라지는 취향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변치 않고 좋아했던 단 한명의 작곡가를 꼽으라면 단연 브람스(Brahms)라고 했다. 그는 "외롭게 음악을 했던 사람에게서 묻어 나오는 감성(pathos)이 작품 전체를 감싸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김씨는 "마치 종교와 산행처럼 음악 역시 일상에서 잠시라도 벗어나 내면의 문을 열고 자기 자신과 맞대면하는 경험"이라며 "그렇기에 음악을 듣기 위해 돈이나 시간보다 더 필요한 건 마음의 준비"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