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09.07.23 05:20
빅토리아 뮬로바

1983년 핀란드에서 공연 중이던 소련의 바이올리니스트 빅토리아 뮬로바(Mullova)와 그의 연인이자 피아노 반주자 박탕 조르다니아(Jordania)가 서방으로 함께 망명합니다. 이들은 감시의 눈을 부릅뜨고 있던 소련 정보기관 KGB를 따돌렸고, 스웨덴 국경을 넘은 뒤에는 가명으로 이틀간 호텔에 투숙했습니다.
뮬로바는 1980년 핀란드 시벨리우스 국제 콩쿠르와 1982년 소련 차이콥스키 콩쿠르에서 연달아 우승했고, 조르다니아 역시 1971년 카라얀 국제 지휘 콩쿠르에서 1위 입상했습니다. 그렇기에 이들의 망명 소식은 세계 음악계에서 화제가 되기에 충분했습니다.
냉전 시기 '철의 장막'에 가려져 있던 소련에서 오히려 전통적인 음악의 결이 더 온전하게 보존됐다는 것은 일종의 아이러니입니다. 철저하게 외부 세계와 단절되어 있었기에 음악에서도 복고적이고 낭만적일 만큼 옛 전통을 고수한 것이지요. 특히 피아노와 바이올린 같은 기악 분야에서는 당시 서방세계에 위협적일 정도로 한치 빈틈없이 정확한 기교와 엄격한 해석을 자랑했습니다.
모스크바 음악원에서 당대의 명(名)바이올리니스트 레오니드 코간(Kogan)을 사사한 뮬로바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망명 직후 인터뷰에서 그는 "어릴 적에는 언제나 연습, 연습, 연습이었다"고 털어놓습니다. '얼음 공주(Ice Maiden)'라는 별명으로 불리면서, 세계 유수의 콩쿠르를 제패한 원동력이 된 셈입니다. 항공 엔지니어였던 아버지와 전직 교사였던 어머니도 딸이 4세부터 레슨을 받을 때마다 항상 곁에서 지켜보면서 직접 메모를 하고, 집에서 다시 그 가르침을 일일이 확인했다는 일화는 이 땅의 여느 음악 가정의 열성과도 흡사합니다.
시간이 흐르면 얼음도 조금씩 녹는 것일까요. 올해 쉰을 맞은 뮬로바의 바이올린에서도 어느새 따스함이 묻어나옵니다. 강렬하고 차가운 현대식 바이올린 대신, 나긋나긋하면서도 인간적인 옛 바이올린으로 바로크 음악에 다가가는 것입니다. 정상에 오른 독주자가 익숙한 방식을 버리고 낯선 세계로 향하는 것이 쉽지만은 않았을 것입니다. 뮬로바 자신도 "언제나 100% 완벽하게 연주할 수 있도록 연습해왔다. 그렇기에 새로운 시도가 미지의 분야로 나가는 것과 다름없었고 사람들이 비웃지나 않을지 두려워하고 상처받기도 했다"고 고백합니다.
최근 발표한 바흐의 〈무반주 소나타와 파르티타〉 음반(오닉스)에서도 뮬로바는 양의 창자로 만든 거트(gut)현과 바로크 활을 택했습니다. 15년 전에 현대식 바이올린으로 녹음했던 같은 곡을 전혀 다른 방식으로 접근한 것입니다.
그는 "예전의 내 바흐 음반을 들을 때마다 그동안 나에게 얼마나 큰 변화가 일어났는지 깨닫고 놀란다. 당시에는 바이올리니스트이기는 했지만, 음악가는 아니었다고 생각한다"고 담담하게 말합니다. 흔히 나이와 함께 늘어나는 것이 고집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뮬로바는 유연함과 개방성으로 음악의 문을 활짝 열어 놓았다는 점에서, 나이를 거꾸로 먹고 있는 바이올리니스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