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며느리는 노래, 손녀는 피아노… 3대(代) 14명의 가족음악회

  • 김성현 기자

입력 : 2009.07.06 03:06

'어머님 마음'의 작곡가 이흥렬 탄생 100주년 기념 공연

"아버지께서는 청첩장 한 장도 버리지 않고 모아서, 뒷장은 작곡하는 데 쓰셨죠." 지난 2일 서울 세종문화회관 M씨어터. 무대 위에 올라간 작곡가 이영조 원장(국립한국예술영재교육원)은 탄생 100주년을 맞은 부친 이흥렬(1909~1980) 선생을 이렇게 기억했다.

작곡가 이흥렬의 이름은 혹시 낯설 수도 있지만 그의 노래는 모를 수가 없다. 어머니들은 〈자장가〉를 읊조리며 아이를 키웠고, 자식들은 〈어머님 마음〉을 어버이날마다 불러 드렸다. 어린이들은 〈섬집 아기〉 〈꽃동산〉 같은 동요를 흥얼거리며 자랐고, 군인들은 〈진짜 사나이〉 등 군가를 부르며 조국을 지켰다. 이날 음악회는 가곡 52편, 동요 65편, 교가(校歌) 138편, 군가(軍歌) 7편 등의 주옥같은 노래를 남겨 '한국의 슈베르트'로 불리는 작곡가의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는 자리였다.

이날을 더 의미 있게 만든 건 출연자 명단이었다. 이흥렬 집안은 아들 이영욱·영조·영수(작곡), 딸 이영희·영금(피아노)과 며느리 이영실·김정희(성악), 손녀 박계선·이현주·이혜주(피아노), 이애란(작곡), 손자 이철주(작곡 및 첼로)와 손자며느리 엘레노어 루스 웰스(첼로)까지 3대에 걸쳐 14명이 같은 길을 걷고 있는 '음악 명가(名家)'다.

이흥렬의 며느리인 메조소프라노 김정희가 〈자장가〉 〈어머님 마음〉을 부르자, 손녀인 피아니스트 이현주는 반주를 맡아 정겨운 '모녀(母女) 협연'을 펼쳤다. 손녀인 이혜주와 이현주는 한 대의 피아노에 나란히 앉아 〈진짜 사나이〉 〈꽃 구름 속에〉를 함께 연주했다. '사나이로 태어나서'로 시작하는 친숙한 군가가 멋진 피아노 연탄곡으로 변신하자 객석에서는 웃음꽃이 번졌다. 아들 이영조 원장은 직접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면서 관객들과 〈섬집 아기〉를 함께 부르는 '앙코르 서비스'를 선사했다. 1대에서 작곡을 하고, 2대에서 편곡과 지휘를 하면, 3대에서 피아노를 연주한 이들의 100년 가족사는 한국의 서양음악 수용 역사와 일치한다.

이날 공연에서는 음악 명가의 생생한 교육 비법도 공개됐다. 이영조 원장은 "아버지께선 악보에 선율 부분만 써놓으신 뒤 자식들을 불러서 '나머지 반주는 너희가 붙여보라'고 말씀하셨다. 당시엔 힘들었지만, 대학 어느 과정보다 많은 공부가 됐다"고 말했다.

작곡가 이흥렬은 일제시대에 선교사 밑에서 서기 일을 보면서 푼푼이 돈을 모아 유학을 떠났고, 냉수 한 컵으로 허기를 달래며 피아노에 매달린 '1세대 작곡가'다. 어둡고 서글프고 힘겹던 시기에 거꾸로 밝고 따뜻한 선율로 힘을 북돋아 주고자 했다. 추상적이거나 난해한 현대음악 대신 교가와 단체가, 기념가와 〈국민 보건체조〉까지 실용적 노래에 애정을 쏟았고, 이 선율들은 삶의 어느 한순간, 우리를 토닥토닥 위로해주는 역할을 했다.

작곡가 이흥렬이 척박한 땅 위에 뿌렸던 씨앗이 풍성한 열매를 맺었다는 점에서 이날 '아주 특별한 가족 음악회'의 의미는 아주 크고 깊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