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09.05.01 02:53 | 수정 : 2009.05.01 20:54
살롱음악회 기획-진행하는 소프라노 이지은
50석의 객석 오른쪽에 조명이 켜지고 장미 한 송이를 든 젊은 테너가 영화 〈미션〉의 주제곡 ‘넬라 판타지아’를 부르기 시작한다. 곧이어 객석 왼쪽, 앞쪽 중앙에도 조명이 차례로 켜지면서 가수들이 등장해 노래를 부른다. 장미를 건넨 후 무대에 오른 세 명의 남자 가수들. 노래가 끝나자 소프라노 이지은이 등장한다. 이날 음악회의 진행과 해설을 맡은 이지은은 세 명의 남자 성악가들을 최근 종영한 드라마 〈꽃보다 남자〉의 F4와 비교하며 소개한다.
삼성동 마리아 칼라스홀에서 공연되는 <해설이 있는 음악회>의 한 장면이다. 아늑하고 정겨웠다. 소규모 객석이라 가수들의 표정까지 생생히 읽을 수 있고, 음향 시설은 어느 음악홀 못지않다.
이지은은 이 음악회의 안방마님이다. 음악평론가 장일범 씨와 공동으로 음악감독을 맡아 매주 두 차례 음악회를 여는데, 매번 프로그램이 바뀐다. 1부는 다양한 장르의 연주나 성악 공연, 2부는 세계적인 오페라 공연이나 음악회를 DVD로 보여주면서 해설을 곁들인다. 음악회 전 1층의 레스토랑 살롱 드 칼라스에서 와인을 곁들여 식사를 하고, 휴식 시간에는 차를 마시며 그날 출연한 음악가와 이야기를 나누거나 사진을 찍을 수도 있다. 티켓 가격이 1인당 18만 원으로 만만치 않지만, 객석이 꽉 찰 정도로 호응이 높다.
살롱 드 칼라스에서 이지은을 만났다. 그는 무대에서처럼 빈틈없이 갖춰 입고 나타났다. 큼직큼직하고 화려한 이목구비와 뛰어난 패션 감각으로 <보그>, <엘르> 등 패션잡지의 모델이기도 했던 프리마돈나다. 세계적인 소프라노 마리아 칼라스와 닮았다는 이야기를 종종 듣는 그가 마리아 칼라스홀의 안방마님이 됐으니 단순한 우연은 아닌 듯하다. 음악홀 로비에 있는 마리아 칼라스 그림은 유난히 그와 닮았다.

“제가 마흔 다섯인데, 오페라 무대에 서면 가장 나이가 많아요. 저희 때만 해도 30대 초반에 데뷔하면 빠른 편에 속했지만 요즘에는 20대에 주역을 맡기 시작하죠. 나이가 좀 있는 실력 있는 아티스트들이 설 무대를 잃어 가는 거예요. 대학에서 제자들을 가르치는데, 아이들이 졸업해도 갈 데가 없다는 사실이 안타까웠죠. 한 해 졸업생 중 무대에 서는 아이는 고작해야 한두 명에 불과합니다. 실력은 있지만 기회를 찾기 어려운 아티스트들을 위해 무대를 만들어 주자는 생각에 뛰어들었어요.”
그는 이 음악회의 거의 모든 과정에 간여한다. 전체 프로그램 구성, 아티스트 섭외, 매 공연 콘티 작성에서 무대에 올라 진행하는 것까지. 관객을 위한 깜짝 선물도 자비로 마련한다. 관객에게 무엇 하나라도 더 전해 주고자 하는 열성이 객석에도 느껴졌다. 그는 아티스트를 세심하게 잘 챙기기로도 유명하다. 연주자들이 대기실에서 편하게 쉴 수 있도록 배려하는 건 기본이고, 잡지나 약을 보내주기도 한다. 무대에 자주 서 봤기 때문에 무대에 서는 연주자들의 심정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그들을 어떻게 하면 빛나게 할까, 고심하게 된다고 한다. 그의 이런 마음 씀슴이에 아티스트들은 무대가 작아도 기꺼이 응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클래식 음악이 발전하려면 스타를 많이 만들어 내야죠
마리아 칼라스홀은 예술에 조예가 깊기로 소문난 대웅상사 윤재훈 대표의 꿈이 실현된 공간이다. 대형 음악홀에서는 연주자나 가수의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 않아 불만이던 윤 대표는, 관객은 가까이에서 음악가의 숨결을 느낄 수 있고, 음악가들은 무대에 오를 수 있는 기회를 더 많이 가질 수 있도록 이 홀을 만들었다. 최초의 살롱음악회 전용홀로 만든 것. 2006년 설립 당시 ‘국내 실정에는 맞지 않는 호화 음악회’라는 우려가 있었으나, 2년 6개월이 지난 지금은 색깔이 분명한 음악회로 자리 잡았다. 정규 음악회 이외에도 송년회, 동창회, 학회 등의 모임에 이 장소를 대여하는데, 호응이 높다. 모임 성격에 따라 식사와 음악회 프로그램을 준비해 ‘맞춤 서비스’를 하기 때문이다.
이곳에서는 대중적으로 잘 알려진 곡을 주로 연주한다. 음악회를 처음 찾은 사람도 부담 없이 즐기게 하기 위해서다. 음악가들이 무대 중간중간 자신의 삶과 음악에 대해 스스럼없이 이야기하는 것도 관객에게 친밀감을 더한다. 이제까지 바이올리니스트 양유진, 테너 류정필, 바리톤 최종우, 피아니스트 박종훈, 이지수, 뮤지컬 배우 김성기, 김아선, 우금지 등이 출연했다.
성악가는 울림통이 커야 제대로 된 소리가 나온다는데, 그는 호리호리한 몸매를 20년 동안 유지해 왔다. 철저한 자기 관리의 결과다. 그는 사실 목 디스크 환자이기도 하다. 9년 전, 오페라 가수로 활발하게 활동할 당시 사고를 당했다. 오페라 <토스카> 주연을 맡아 연일 박수갈채를 받으면서 소프라노 이지은의 존재를 알리던 중요한 시점이었다. ‘별일 아니겠거니’ 하고 가볍게 넘겼다가 ‘목 디스크 파열’이라는, 가수로서 치명적인 병을 얻었다. 의사는 뒷목에 칼을 대는 수술을 해야 한다고 했지만, 잘못될 경우 고음이 안 날 수도 있다는 청천벽력 같은 말에 수술하지 않고 지금까지 버티고 있다. 수술 대신 한방 치료와 꾸준한 운동으로 더 이상 악화되지 않도록 몸을 관리하고 있다고 한다.
그는 <해설이 있는 음악회> 외에도 <이지은의 톡 콘서트>를 진행하고 있다. 매달 둘째・넷째 주 목요일에 마리아 칼라스홀에서 진행되는 브런치 콘서트다. 오전 11시에 샌드위치와 도넛, 커피 등으로 브런치를 먹고 감상하는 콘서트로, 주부나 근무 시간이 자유로운 직장인 등이 많이 온다고 한다. 음악회를 진행하면서 그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이렇게 클래식 음악을 사랑하는지 몰랐다”고 말한다. 처음에는 ‘오페라 가수가 웬 외도냐?’라는 주위의 따가운 시선이 적지 않았고, 그도 확신이 없는 상태로 뛰어들었지만 점점 이 분야에 사명감과 확신이 든다고 한다.
“아무리 목에 힘을 주고 ‘나는 프리마돈나야’ 라고 해 봐야 대중이 아는 오페라 가수는 신영옥, 조수미 선생님 정도예요. 소프라노 이지은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어요. 이 분야에서 엄청 유명한 테너나 바리톤 가수라 해도 대중은 거의 모르죠. 클래식 음악이 대중화하려면 스타가 많이 나와야 합니다. 스타가 되는 것보다 스타를 만들어 내는 일이 제겐 더 중요해졌습니다.”
그의 포부는 소박한 듯 거창하다. 이탈리아에서 배워 온 정통 오페라를 대중이 즐길 수 있도록 공연하는 것이다.
“한국에 와서는 이탈리아에서 배운 노래를 해 본 적이 없어요. 허락하는 공연장이 없거든요. 지금은 이 음악회에서 대중적인 곡 위주로 하지만, 관객의 수준이 조금 더 높아지면 언젠가 그때 배운 노래를 무대에서 할 날이 오겠죠? 그날이 오는 데 제가 조금이라도 일조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해요.”
- C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