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게 피카소 걸작인데…' 하는 부모는 빵점"

  • 박돈규 기자

입력 : 2009.05.04 03:01

인기 애니메이션 '빠삐에 친구' 원작자 불(佛) 밀라 부탕 방한

'종이 할머니'로 불리는 밀라 부탕(Boutan·73·프랑스)씨는 빨간 색종이를 집더니 천천히 찢었다. "보세요. 종이는 찢어질 때 이렇게 다른 질감의 속살이 나옵니다." 그렇게 굴곡을 넣어 두 번 찢고 포개니 겹쳐진 산처럼 보였다. "이걸 바다로 바꿔 볼까요?" 파란 색종이를 밑에 깔자 능선은 일렁이는 파도가 됐다. 노란 색종이를 찢어 해를 띄우고 초록색 종이 물고기 한 마리를 넣는 것으로 마무리. 2분 만에 '색종이 그림' 한 점을 완성한 부탕 할머니는 "아이가 급하지 않게, 편안한 마음으로 하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다.

EBS 인기 애니메이션 '빠삐에 친구'의 원작자 밀라 부탕을 지난 1일 서울 광화문에서 만났다. 아바(기린)·리코(토끼)·테오(곰) 등 그가 종이로 만든 캐릭터들을 이제 무대에서 만날 수 있다. 아동극 '빠삐에 친구―잃어버린 글씨'(5일까지 서울 구로아트밸리, 12일부터 학전그린) 세계 초연을 보러 내한한 부탕은 "나는 작은 씨(종이 캐릭터)를 뿌렸을 뿐인데 꽃(공연)으로 피어나는 것 같아 행복하다"고 했다.

부탕은 하베아라는 스페인 동부의 오지(奧地)에서 태어났다. 부모는 결혼 12년 만에 아이를 얻은 기쁨을 이름(밀라는 '기적'이라는 뜻의 미라클에서 왔다)에 담았다. "신문도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마을이었어요. 자연뿐이었죠. 땅은 건조하고 돌이 많았는데 돌 밑은 습해서 전갈이 살았어요. 우물에서 길어 먹는 물은 금(金)처럼 귀했고…." 자연을 존중하는 법을 일찍 터득한 그는 미술교육을 전공한 후 1970년대부터 프랑스 교육방송에서 종이 놀이를 전파했다.

1일 오후 서울 광화문에서 만난‘종이 할머니’밀라 부탕씨는 색종이를 접고 찢고 붙여서 작품 하나를 뚝딱 만들었다./이준헌 객원기자 heon@chosun.com

"종이 그림을 만드는 아이는 물감이나 연필로 그릴 때와는 마음가짐부터 달라요. 망쳐도 버리면 그만이니 무서울 게 없고, 찢으면서 스트레스도 풀리지요. 촉감·모양에 대한 상상력을 기를 수 있고 또 종이는 입으로 훅 불면 움직이니까 살아 있는 친구도 됩니다."

'종이 할머니'는 아이 교육법에 대한 지혜도 들려줬다. "여러 가지를 보여주려고 하지 말고 그림 한 점, 꽃 한 송이를 오래 관찰할 수 있게 기다려줘야 한다"고 했다. 피카소 그림 앞에 아이를 내려놓고 "이게 피카소라는 화가의 걸작인데…"로 시작하는 부모는 '빵점'이란다. 아이가 자기만의 감상에 젖을 시간을 가로채기 때문이다.

부탕이 대단한 것을 발견했다는 투로 말했다. "비행기가 인천공항을 향해 하강할 때였어요. 안개가 짙게 끼어 있었죠. 처음엔 뿌옇다가 조금씩 형체가 드러나는 겁니다. 섬이, 바다가, 나무가, 활주로가…. 투명도가 다른 종이들을 쓰면 뭔가 만들 수 있지 않을까요?" 밤잠 설쳤다는 '종이 할머니' 얼굴에 생기가 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