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의 언어로 나빌레라

  • 성남문화재단
  • 글=정재왈
  • 사진=정형우

입력 : 2009.04.20 10:17

제3회 성남국제무용제 조직위원장 박인자

성남국제무용제 조직위원장 박인자/사진=성남문화재단

한때 예술의전당 한 지붕 밑에서 같이 지낼 때가 있었다. 그렇다고 터놓고 지낸 사이는 아니었다. 명색이 각각 국립단체 단체장으로서, 예술의전당에 더부살이 하는 처지에 연민의 정을 느낄 법도 한데 영 그러지는 못했다. 각자 바빴으니까. 그러면서도 내가 느낀 한 가지는, 박인자 씨는 대단히 화통한 사람 같다는 것이었다. 소문 술, 특히 소수를 좋아한다고 하기에 동지애를 느끼고 한 잔 같이 했으면 했는데 결국 못했다. 아쉽게 시간(세월까진 아니다)은 지났고, 각자 한 지붕에서도 벗어났다.

오랜만에 박 씨를 만난 것은, 지난 3월 성남아트센터에서였다. 지난 정리도 확인할 겸 이 코너의 초대 손님으로 모시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박 씨는 국립발레단장 임기를 마치고 학교(숙명여대 교수)로 복귀했는데도, 특유의 극성스러움은 그녀를 현장으로  발길을 돌리게 했다. 요즘 이 대학 저 대학을 전전하는 ‘전업강사’인 내가 제일 부러워하는 직업이 대학교수(님)다.

진작 그 길을 팠다면 되지 못하란 법도 없었겠지만, 그들에겐 학교 밖 기관장을 맡는 등 ‘외도’도 그 자체가 영광이요, 더 부러운 것은 그 이후 돌아갈 곳이 있다는 점이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면, 언론사 초년생부터 문화예술계에 큰 뜻을 품고 올인 했으며, 나름의 도전과 변신에 보람을 느끼며 여기까지 왔으나, 내게 사회적 보상이란 과연 무엇일까, 마음이 아릴 때가 가끔 있다. 그 점에서 학교와 현장을 종횡무진 하는 박 씨는 내 부러움의 대상이다. 박 씨는 올해로 세 번째가 되는 ‘성남국제무용제’의 조직위원장(예술 감독)을 맡아 학교 밖 현장에서도 씽씽 달리고 있다. 개인적인 욕심이야 누가 말리겠냐만, 슬쩍 시비를 걸어봤다.

- 참 욕심이 많네요. 페스티벌 디렉터는 처음이지요. 부럽습니다.
“이미 자리 잡은 페스티벌에 힘을 보태는 정도인데요 뭐. 올해를 기점으로 격년제도 열린다고 하네요. 앞날이야 모르지만, 최선을 다해 성공한 페스티벌로 성장하도록 힘을 보태고 싶습니다.”
- 일단 과거에 대한 평가는 묻어 버립시다. 올해 ‘박인자표’ 페스티벌의 특징은 무엇인가요?
“내용(프로그램)의 충실도입니다. 2007년 말 국립발레단을 떠난 뒤 지난해부터 거의 이 페스티벌에 생각을 집중했어요. 내한 공연하는 외국의 좋은 무용가(수)도 눈여겨보았고, 여러 공동작업도 모색했지요. 특히 축제의 하이라이트라고 할 수 있는 ‘갈라’를 보강했습니다. ‘월드스타 갈라’에 강수진(독일 슈투트가르트발레단 수석무용수)을 초대한 것은 큰 행운입니다.”

그러면서 박 씨는 슬그머니 프로그램 전단을 내보였다. 그토록 자랑하는 갈라는 갈라 답게 화려하다. 강수진을 필두로 그녀의 발레단 동료 제이슨 라일리, 러시아 볼쇼이 발레단의 수석 아나 안토니체바, 킬리언이 이끄는 네덜란드 댄스 시어터 2(NDTⅡ)의 원진영, 미국 아메리칸 발레시어터 2(ABTⅡ)의 박세은, 토종 이원국(이원국발레단 예술 감독)과 신창호(LDP안무가 겸 단원) 등. 박 씨의 전공인 발레에 집중된 감은 있지만, 그녀만의 색깔이라면 이해하지 못할 바도 아니다.

- 갈라는 일종의 ‘모으기’지요. 박 위원장님의 권위로 사람 모으는 그 정도는 약과인 것 같고요. 더 노력이 들어간 것은 없나요? 페스티벌에 고민이 담긴 흔적 같은 것 말이지요.
“참신한 무대, 새로운 시도로 ‘국가 간 공동프로젝트 시리즈’와 ‘크로스 오버 댄스’를 꼽고 싶어요. 김삼진과 김원 등 한국의 중견 무용가와 미국, 아르헨티나, 네덜란드, 벨기에 등의 무용가들이 어울려 다양한 시도를 보여줍니다. 동서양, 무용과 영상 등 이질적이면서 상보적인 것들의 만남과 충돌을 통해 무용의 영역이 얼마나 넓은 지를 보여주고 싶어요.”

성남국제무용제 조직위원장 박인자/사진=성남문화재단
페스티벌 등 대형 이벤트의 책임자는 작품 안목 못지않게 재원 조달 능력도 중요하다. 이 분야에서 박씨는 ‘달인’의 경지다. 역설적이면서도 명명백백한 사실은, 예술은 어느 정도 ‘돈 게임’이라는 것. 허나 그 쓰임에 따라 결과는 독이 될 수 있고 약이 될 수도 있으나, 적은 것보다 많은 게 낫지 않나 싶다. 재원과 관련해, 성남국제무용제는 비슷한 규모의 다른 국제무용제에 비해 형편이 꽤 양호한 것 같다.

 - 예산 규모는 어느 정도죠? 성남아트센터, 아니 돈 줄을 쥐고 있는 성남시의 지원은 넉넉한 편인가요?
“두 차례 페스티벌을 통해 무용에 대한 시민들이 인식은 꽤 높은 편입니다. 그 결과 시에서 전향적으로 도우려고 많이 애를 쓰는 것 같아요. 총 예산이 6억 원인데, 5억 정도가 시에서, 나머지 1억 원 이상은 제가 발품을 팔아 마련한 협찬금으로 충당하고 있어요.”

경제 한파로 기업들이 지갑을 꼭꼭 싸매고 있는 통에도 박 씨의 수완은 빛났다. 요로의 네트워크가 대단하다는 소문이야 익히 들어 알지만, 이 어려운 때 억대의 협찬을 모으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해본 사람은 다 안다. 그게 얼마나 구차하며 힘든 일인지를 말이다.
한국적인 지원 정책의 특수성 아래에서, 예술 활동 지원의 일차적인 책임은 정부나 지자체의 몫이 클 수밖에 없다. 기업은 주면 좋고 안주면 그만이다. 성남시민들이 이 축제를 지방 축제의 성공모델로 만들고 싶다면, 관심 못지않게 실질적인 재정적인 지원도 아끼지 말아야 한다.

지난해 여름 자발적인 실업을 자처한 뒤 화병을 달랠 겸 무작정 유럽 배낭여행을 떠났었다. 꿈에 그리던 스페인의 바르셀로나로 향하던 중, 이 나그네에게 하룻밤 단잠을 제공했던 남프랑스의 몽펠리에를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성남시와는 비교할 수 없는 이 작은 도시를 명품으로 만든 것 가운데 하나가 국제적인 무용축제다. 유럽 현대무용의 발신지를 논할 때 이곳을 빼놓고 이야기 할 수 없다. 마침 성남국제무용제의 프로그램에도 소개된 에미오 그레코가 정상으로 발돋움한 계기가 됐던 무대가 바로 이 축제였다. 성남국제무용제가 그 정도의 미래 비전을 갖고 발전했으면 좋겠다.

-우리도 그럴 수 있을까요?  한국 무용가들의 능력과 마음가짐 등 준비가 필요하다고 보는데요.
“우선 대학 무용과 중심으로 발전한 ‘학력위주’ 시스템에 변화가 필요할 것 같네요. 해외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제자나 후배들을 보면 더욱 그런 생각이 들어요. 다음으로 사회적인 지원인데, 정부나 지자체보다 기업 등 민간의 후원활동이 늘어나야 무용도 다채롭게 발전할 것 같습니다.”    

 - 이제 축제 이야기는 그렇고, 개인적인 질문 한 두 가지 합시다. 솔직히 너무 젊어 보여서 얼굴로는 가늠이 안돼요. 나이가 몇이세요?
 “이런, 실례의 질문을 하시다니. 1978년생 아들과 1982년 생 딸을 두고 있으니 대충 상상하시지요. 대학 정년도 10년 안쪽으로 남았고. 애들한테 손자 보게 해달라고 애원할 때이니 짐작해 보시죠.”
공인으로서 정보 외에 박 씨에 대한 사적인 이야기는 별로 아는 바가 없어서 불쑥 던진 질문인데, 요령껏 잘 피했다. 젊음의 비결을 묻자 “스트레스를 즐긴다”는 답이 왔다. 보편적으로 내향적인 여느 무용가들에 비해 확실히 성격이 외향적이다 싶었는데, 스트레스를 그때그때 산화시켜 버릴 수 있다니 이 또한 복 받은 사람이 아닌가 싶다.

예술에 대한 내 개인적인 취향에서 보면, 무용은 다른 장르에 비해 높은 경지로 친다. 등위를 매긴다면 첫째 단계에 놓인다고 할까. 내 방식대로 정의하면 ‘무용은 몸으로 쓴 시’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국의 무대에서 실제로 보이는 무용은 내 정의를 배반하는 경우가 많아 실망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자, 이제 완연한 봄이다. 예술을 즐길만한 적당한 중산층이 형성돼 있고, 잘 정돈된 자연친화적인 도시 성남에서 봄의 기운을 맛보고 싶다면 그곳에 가라! 나 또한 ‘박인자표’ 축제를 보러 갈 참이다. 그곳에 뭔가 다른 게 있다니.    
  • C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