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욕과 생존의 역사를 춤추다

  • 성남문화재단
  • 김영주(월간 '더뮤지컬' 기자)
  • 사진=김영관

입력 : 2009.04.20 09:58

국수호 디딤무용단 '남한산성에 피는 꽃-이화(梨花)'

'남한산성에 피는 꽃-이화(梨花)'/사진=국수호 디딤무용단

조선 사회가 겪은 가장 치명적인 외침이라면 누구나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손꼽을 것이다. 임진왜란(1592~1598)이 무려 6년간 지속되었고, 병자호란은 1636년 12월에 개전하여 이듬 해 1월에 막을 내렸다. 전쟁기간으로만 보면 왜란으로 인한 폐해가 훨씬 크고 깊었으리라는 짐작을 어렵잖게 할 수 있다.

하지만 한민족에게 더 어둡고 수치스러운 기억으로 각인된 쪽은 병자호란이 아닌가 싶다. 충무공 이순신이 이끈 수군과 전국각지에서 의병들이 거두었던 기적 같은 승리가 민족사의 영광스런 순간으로 기록될 수 있었던 것에 비해, 병자호란은 아주 작은 승리조차 존재하지 않았던 오욕의 역사였기 때문이다.

임진왜란과 관련된 작품이 끊임없이 만들어졌던 것에 비해 병자호란을 이야기하는 작품이 드물었던 것 역시 같은 까닭일 것이다. 어떤 영웅도 존재하지 않는 패배한 전쟁에 대해 우리가 다르게 인식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준 것은 김훈의 소설 <남한산성>이다. 작가 김훈은 이 소설에서 서서 죽기를 원한 자들(주전파)과 꿇고 살기로 결심한 자들(주화파)이 실은 불가항력의 삶을 필사적으로 살아내려는 똑같은 인간의 얼굴을 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 소설을 바탕으로 오는 10월 성남아트센터에서 초연할 뮤지컬 '남한산성'에 대한 기대와 관심이 커져가는 가운데 국수호 디딤무용단의 '남한산성에 피는 꽃-이화(梨花)'이 2007년 첫 공연 이후 2년 만에 같은 무대에 올려 진다. 전통무용의 극화에 있어서 견줄 이가 없는 독보적인 권위를 가지고 있는 국수호는 김훈과는 또 다른 관점에서 같은 시대, 같은 전쟁을 바라보면서 새로운 방식의 무용극을 만들어냈다.

총체적 가무악극을 지향하는 '남한산성에 피는 꽃-이화(梨花)'은 병자호란이 남긴 상흔 중 가장 모순적인 비극으로 기억되는 환향녀에 얽힌 이야기를 담고 있다. 작품은 유복하게 자란 두 청춘 남녀가 서로에 대한 지극한 사랑으로 맺어짐을 묘사하면서 시작된다. 인상적인 것은, 주인공 이화와 춘풍이 마을 사람들의 축복 속에서 두 폭의 청색과 홍색 천으로 휘감아 도는 춤을 추는 동안 흐르는 음악이다.

주인공 커플의 입장에서 두 뮤지컬 배우가 부르는 듀엣 곡이다. '화성에서 꿈꾸다'로 2006년 한국뮤지컬대상시상식에서 음악상을 수상한 강상구가 작곡을 하고 극작가 배삼식이 가사를 썼다. 그런 연유 때문인지 뮤지컬 요소를 적잖이 볼 수 있다. 극 중 내용과 인물들의 심리상태를 격조 있게 풀어낸 가사는 무용극에 익숙하지 않은 관객의 이해를 도울 것으로 기대된다.

국수호는 고립된 남한산성 안에서 국운을 걸고 각자의 방식으로 전쟁을 치르는 이들의 모습을 다양한 춤 어휘로 표현했다. 두 남녀 주인공 못지않게, 주전파와 주화파 사이에서 고뇌하는 인조의 갈등도 심도 있게 형상화했다. 청나라의 이국적인 문화를 보여주는 춤은 흡사 발레의 디베르티스망을 연상시키는 흥미로운 볼거리가 될 것이다.

거대한 역사의 수레바퀴 아래서 희생당한 죄 없는 청춘들을 위한 진혼무이자, 오늘날 우리가 발 딛고 서 있는 이 땅에서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 곱씹어 볼 계기가 될 만한 작품이다.


국수호 디딤무용단 '남한산성에 피는 꽃-이화(梨花)'

일시 : 5월 2일 오후 5시
장소 : 성남아트센터 오페라하우스
문의 : 031-783-8000

  • C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