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극 후반 1~2분간 펼쳐지는 암흑 무대 돋보여

  • 박돈규 기자

입력 : 2009.04.16 02:49

연극 '맹목'

객석에 앉으면서부터 관객은 불안하다. 정삼각형들을 쌓아 올린 구조물이 무대를 장악하고 있다. 문은 기울어져 있고 더듬더듬 등장하는 배우들 눈에는 초점이 없다.

시각장애인 학교를 배경으로 한 《맹목(Blindness)》에서 등장인물들은 거의 다 앞을 못 본다. 이 연극은 시각장애인을 두 눈 부릅뜨고 관찰해야 하는 비(非)일상으로 관객을 몰아넣는다. 그리고 그 낯선 '암흑' 속에서 날카로운 언어로 우리를 후려친다.

존재한다는 것에 대해 충격적 질문을 던지는 연극《맹목》./이다 제공

스페인 작가 안토니오 브에로 바예호가 쓴 《맹목》(원제: 타오르는 어둠 속에서)은 평온한 학교에 시우(전종배)가 전학 오면서 퍼져 나가는 소용돌이를 따라간다. 지팡이를 앞세우고 나온 시우는 긴장한 얼굴로 "난 그냥 불쌍한 장님"이라고 소개한다. 교장과 기로(이갑선) 등 학생들은 "우린 여기가 익숙하고 너도 곧 온전한 인간이 될 것"이라고 하지만, 시우는 "그건 가짜고 눈먼 병신들의 허세"라고 반격한다. 질서와 무질서의 충돌이다.

앞을 보는 사람은 교감(교장의 부인)뿐인 이 학교에서 시우는 강력한 바이러스처럼 모두의 삶을 무너뜨린다. 그를 따르는 추종자와 애인도 생긴다. 언어는 직설적이고 집중이 잘 됐다. 무대 위 다른 인물은 못 보는데 관객만 보는 장면이 많아, 눈으로 즐기는 방백(傍白) 같았다.

극의 후반부 1~2분간 극장 전체를 암흑에 빠뜨린 채 대사를 들려주는 대목은 올해의 수확이라고 할 만하다. 이 장면은 낙엽이 날리고 피아노 연주가 들어오는 것으로 예고돼 "뭔지 알지도 못하면서 평생을 보낸다"는 대사와 조응했다. 꺼질 듯 살아나는 촛불처럼 가늘게 드나드는 조명도 좋았다. 이어진 기로의 대사가 이 비극의 탈출구였다. "…너 자신이 죽고 다른 사람도 죽이는 것, 그게 죽음이야. 난 끝까지 살아갈 거야!"

극단 물리에서 조연출로 청춘을 보내고 이 연극으로 데뷔한 연출가 오김수희는 맹목적인 것의 아름다움을 포착해냈다. 때론 감정을 밑바닥까지 긁어대며 소리를 질렀고 때론 입을 다물고 피아노 연주를 들여보냈다. 소극장 연극으론 보기 드문 미학이었다. 자신감 넘치는 화법, 사건을 벌였다가 오므리는 솜씨가 있었다. 없어도 될 것 같은 인물을 놓아둔 점, 설정에 집중하느라 세부묘사가 부족한 점은 아쉽다.

▶26일까지 대학로 설치극장 정미소. (02)762-0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