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식 ABC] 바흐 차남의 효심(孝心)이 아버지의 음악을 구했네

  • 김성현 기자

입력 : 2009.04.15 03:22

바흐의 차남이자 지극한 효자였던 칼 필립 에마누엘 바흐.
클래식 역사상 최강의 음악 가문은 '음악의 아버지'로 불리는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Bach·1685~1750)의 일가(一家)입니다. 바흐의 증조부 요한 한스 바흐를 비롯해 조부(祖父)와 종조부(從祖父) 3명, 아버지 요한 암브로시우스와 그의 형제 및 사촌 9명이 모두 악사(樂士), 오르가니스트, 작곡가나 악기 제작자로 일했습니다.

"에르푸르트에서 아이제나흐에 이르는 독일 중부의 튀링겐 지방에서 '바흐'라는 이름은 곧바로 '음악가'를 의미했다"고 할 정도였지요. 최초의 바흐 전기 작가인 포르켈은 "바흐 가문의 선조인 16세기 제분업자 파이트 바흐부터 7대에 이르는 그의 자손들은 음악에 몸을 바쳐 두세 명의 예외를 제외하면 모두 음악을 해온 것이 확실하다"고 기록합니다.

바흐의 자녀 역시 장남 빌헬름 프리데만 바흐(W.F. Bach)를 비롯해 차남 칼 필립 에마누엘 바흐(C.P.E. Bach)와 요한 크리스토프 프리드리히 바흐, 막내아들 요한 크리스티안 바흐까지 모두 음악가로 성장합니다.

'음악의 아버지’요한 제바스티안 바흐의 차남 칼 필립 에마누엘 바흐를 궁정음악가로 발탁한 프로이센의 계몽군주 프리드리히 2세(가운데)가 플루트를 연주하고 있다. 그는“군주는 국가 제1의 머슴”이라는 말을 남겼다. 아돌프 폰 멘첼의 그림.
이 가운데 음악사에 '바흐의 효자(孝子)'로 기록된 아들이 바로 차남입니다. 부친 타계 이후, 유산 정리 과정에서 바흐의 자필 악보도 가족에게 배분됐지요. 장남은 할레의 교회에서 직장을 그만둔 뒤에 경제적 곤경에 처하자 자신이 물려받은 유산을 내다 팔았습니다.

반면 차남에게 돌아갔던 아버지의 악보는 대부분 완벽하게 보존됐습니다. 《마태수난곡》 《요한 수난곡》 《크리스마스 오라토리오》 등 바흐의 수많은 걸작을 현재 연주하거나 들을 수 있는 것도 차남 덕분입니다.

그는 아버지 사후 전기 작가 포르켈에 31통의 편지를 보내며 전기 집필을 발벗고 돕습니다. "고인은 경건한 마음을 담아, 가사의 내용에 입각해서 작업했고 따라서 어쭙잖은 언어유희나 개별 어구의 표현에 집착하지 않고 고스란히 이해되는 표현만을 남기려고 했다"는 편지에는 효심이 가득합니다.

바흐의 차남은 1738년 프로이센 황태자의 궁정악단에 들어갔고, 2년여 뒤 황태자가 프리드리히 2세로 등극하자 베를린 궁정음악가로 탄탄한 입지를 구축합니다. 1768년 대부(代父)였던 작곡가 텔레만이 숨을 거둔 뒤, 후임으로 함부르크 교회 음악감독을 맡기도 했습니다.

모차르트는 "그가 아버지라면, 우리는 그의 자식들이다"라고 말할 정도로 바흐의 차남 C.P.E. 바흐를 높이 평가했지만, 19세기 낭만주의 시기에 들어서면서 슈만이 "창조적 음악가로서 그는 아버지에 훨씬 못 미쳤다"고 비판할 만큼 사실상 푸대접을 받았습니다.

C.P.E. 바흐의 음악에 대한 재평가가 활발해진 것은 고(古)음악 열기가 뜨거워진 최근의 일입니다. 20세기 후반 들면서 연주자들은 교향곡과 건반 독주곡, 종교곡 등 그의 작품을 앞다퉈 연주했고, 명(名)첼리스트 안너 빌스마가 녹음한 C.P.E. 바흐의 첼로 협주곡은 바로크 시대의 비발디와 고전파 시기의 하이든을 잇는 중요한 첼로 작품으로 인정받습니다.

효심(孝心)과 음악성 사이에 별다른 함수 관계가 있는 건 아닙니다. 하지만 C.P.E. 바흐가 '효자'에서 '또 하나의 거장'으로 격상되는 모습을 보면, 때때로 지극한 효심에는 세상도 무심치 않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