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 무대 위에 서다

  • 박돈규 기자

입력 : 2009.04.09 05:38

생물·물리학 연극 나오고 로봇들이 배우로 출연 디지털 퍼포먼스도 등장

과학이 무대로 돌진한다. 서울 대학로에 가면 생물학·화학·물리학을 이야기의 소재로 쓴 '과학연극'을 볼 수 있다. 5월 국립극장 무대에는 로봇(robot)이 출연해 창(唱)을 하고 관객을 웃긴다. 로봇 무대, 디지털 퍼포먼스 등 과학은 이미 연출의 영토를 점령해가고 있다. 오랫동안 '반(反)과학'으로 불려온 연극이 과학과 화해한 것일까.

"인간이란 무엇인가?"

두산아트센터에서 공연 중인 연극 《과학 하는 마음-발칸동물원》(연출 성기웅)은 이런 질문으로 뇌세포를 자극한다. 무대는 어느 생명과학 연구실. 흰 가운을 입은 배우들(과학자들)은 "전쟁터에서 식물인간이 된 세계적인 과학자의 뇌를 보존해달라"는 충격적인 요청을 놓고 토론을 벌인다.

이 과학연극 시리즈는 화학을 다루는 김광보 연출의 《산소(Oxygen)》, 양자물리학을 파헤치는 《코펜하겐》(연출 윤우영), 고(古)생물학이 재료인 《하얀 앵두》(배삼식 작·김동현 연출)로 7월까지 이어진다. 두산아트센터는 "과학고와 중·고교 영재반 등의 단체관람 문의가 많다"고 밝혔다. 《산소》의 김광보 연출은 "수학자가 주인공인 연극 《프루프》가 수학이 아닌 부녀(父女) 관계에 집중했듯이 과학연극도 결국 인간을 비춘다"며 "소재로써 과학을 발굴한 것일 뿐 연극은 본질적으로 수공업"이라고 말했다.

로봇, 출연료를 받다

하지만 5월 1~10일 국립극장 달오름극장에서 공연하는 《엄마와 함께하는 국악보따리》를 보면 관점이 달라진다. 이 무대에는 한국생산기술연구원이 제작한 안드로이드 로봇 에버(EveR-3)와 휴머노이드 로봇 세로피(Seropi)가 등장한다. 국립극장은 "9회 공연하는 두 로봇에게 100만원씩 총 200만원을 준다"고 밝혔다. 국내에서 '로봇 배우'가 상업공연 출연료를 챙기기는 처음이다.

무선조종되는 심부름 로봇 세로피(키 125㎝, 체중 55㎏)는 관객을 무장해제시키고, 사람을 닮은 에버(157㎝, 50㎏)는 안면 근육과 팔을 움직이며 〈사랑가〉 등을 부른다. 생산기술연구원 이호길 박사는 "에버의 연구·개발에만 2005년부터 20억원이 들었다"며 "옥타브나 리듬·억양을 표현할 수는 없지만 공연·이벤트·패션쇼 등에 쓰임새가 많다"고 말했다.

2007년 고양아람누리에서 미래형 디지털 퍼포먼스 《신타지아》를 공연해 주목받은 KAIST(한국과학기술원)도 후속 연구를 진행 중이다. 가상현실(VR), 아바타와 인간의 상호작용, 서로 다른 공간을 잇는 네트워크 공연 등이다. 휴먼로봇 연구로 유명한 오준호 교수는 최근 김장훈 콘서트에 6개의 축을 입체적으로 쓰는 '로봇 무대'를 선보였다.

누가 누가 로봇일까 배우들 틈에 낀 로봇 둘을 찾아보자. 국립국악관현악단의《엄마와 함께하는 국악 보따리》에 출연하는 심부름 로봇 세로피(오른쪽)와 노래하는 로봇에버(왼쪽 끝). 한번 공연하려면 3시간 충전해야 한다./국립극장 제공
중요한 것은 조화

로봇은 연극에 득(得)일까 실(失)일까. 《안데르센 프로젝트》의 캐나다 연출가 로베르 르파주는 "테크놀로지가 두렵지 않다"고 말한다. "옛날 사람들이 불 주변에 모여 이야기를 시작했고 그림자를 보며 연극 놀이를 발견했듯, 첨단기술도 잘만 쓰면 연극에 이롭다"는 것이다.

일본 연출가 히라타 오리자(平田オリザ)는 지난해 11월 로봇과 인간이 상호작용하는 연극 《일하는 나》로 관객을 울렸다. 5월 독일 에센 페스티벌에서 초청공연을 하는 그는 "어디까지 인간이고 로봇인지에 대한 근원적 질문을 갖고 있다"고 했다.

좋은 연극은 인간을 성찰하게 한다. 연극평론가 김명화씨는 "단순히 테크놀로지를 숭배하는 것이라면 위험하다"면서 "기계 인간이 등장해 우리가 깊은 혼란을 겪으며 휴머니즘에 대해 반성할 수 있다면 긍정적"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