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09.04.07 06:09
제르킨이 18세의 나이로 독일 베를린에서 첫 공연을 가진 1921년의 일입니다. 바흐의 〈브란덴부르크 협주곡 5번〉을 연주했고 음악회는 대성공으로 끝났습니다. 부슈는 제르킨에게 앙코르를 연주하라며 등을 떠밀었지요. 제르킨이 "어떤 곡을 연주할까요?"라고 묻자, 12세 연상의 부슈는 짓궂게도 "골드베르크 변주곡"이라고 말했답니다. 바흐의 이 변주곡은 일절 반복 없이 연주해도 최소 30여분이 걸립니다.

변주곡 전곡을 앙코르로 연주하고 나자, 공연장에 남아있던 사람은 딱 4명이었다고 합니다. 부슈와 명(名)피아니스트 아르투르 슈나벨, 음악학자 알프레드 아인슈타인, 그리고 연주자 자신이었다고 훗날 인터뷰에서 털어놓습니다. 무지막지하게 긴 앙코르가 관객들을 쫓아낸 셈입니다.
최근 두 번째 내한 공연을 마친 러시아의 피아니스트 예프게니 키신(Kissin·38)도 앙코르로는 둘째 가라면 서러워할 연주자입니다. 1997년 영국의 음악축제 BBC 프롬스에서 열렸던 리사이틀 당시 로열 앨버트 홀에 모여든 6000여명의 관객 앞에서 키신은 7곡의 앙코르를 선사하며 깊은 인상을 남겼습니다.
이 축제는 객석 1층의 관객들이 줄곧 서서 공연을 듣는 것으로 유명합니다. 청중이 발로 마룻바닥을 구르며 연주자를 연방 무대로 불러내자, 키신은 마치 권투선수처럼 관중을 헤치고 계단을 내려와 무대 한복판의 피아노 앞에서 다시 앙코르를 연주했지요. 2006년에 이어 올해 내한 연주에서 또다시 10곡을 들려주고, 수년 전 나폴리에서는 무려 16곡을 쏟아냈던 '키신 앙코르 신화'의 출발점입니다.
보통 클래식 음악회는 아무 말 없이 연주에만 몰두하기 때문에, 앙코르는 연주자의 숨겨져 있던 모습을 보여주는 '비장의 무기'가 됩니다. 대표적인 경우가 바로 중국의 피아니스트 랑랑(郞朗)입니다. 지난 2003년 미국 뉴욕의 카네기 홀 데뷔 독주회 때의 일입니다.
여느 콘서트처럼 리스트와 슈만의 곡을 앙코르로 들려준 뒤, 우리의 해금을 닮은 중국의 전통악기 얼후(二胡) 연주자가 무대에 등장해 랑랑과 '깜짝 이중주'를 펼쳤습니다. 매력적인 얼후 연주를 선보인 주인공은 다름 아닌 랑랑의 아버지였지요. 그런가 하면 평소 무대에서 선보였던 앙코르들을 모아서 〈호라이즌스(Horizons)〉라는 별도의 음반으로 펴낸 피아니스트 레이프 오베 안스네스(Andsnes) 같은 '실속파'도 있습니다.
'다시'라는 뜻의 불어인 앙코르(encore)는 말 그대로 선물이자 보너스입니다. 1시간을 훌쩍 넘는 말러와 브루크너의 대작(大作) 교향곡이나 메시앙처럼 난해한 20세기 관현악을 연주한 교향악단에게 무조건 앙코르를 바라는 건, 산악 등정을 갓 마친 등반대가 미처 숨도 돌리기도 전에 곧바로 짐 챙기라고 다시 길을 재촉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마찬가지로 까다로운 기교와 필사적 노력을 요구하는 낭만주의 협주곡을 협연한 연주자에게도 무리하게 앙코르를 요청하지는 않습니다. 음악 선물 역시 마음에서 마음으로 주고받는 것이 가장 아름답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