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객석의 4시간은 길고… 무대위 '상징'은 강렬하다

  • 박돈규 기자

입력 : 2009.04.06 03:15

연극 '파우스트'

"탕! 탕!" 악마 메피스토펠레스가 무대에서 클레이 사격을 했다. 주황색 원반이 날아가다 산산조각났다. 가루가 날렸고 화약 냄새가 풍겼다. 천장에서 쿵! 의자와 책뭉치가 떨어지고 그 먼지 속에 등장한 파우스트 박사는 "철학·법학·의학에 신학까지 연구했지만 지금 나는 어리석고 즐거움은 사라져버렸다"고 탄식한다.

그는 어둠을 비추던 백열등에서 전구를 빼낸다. 전등갓을 뒤집어 독배처럼 들이킬 때 들려오는 노랫소리. "딩, 당, 딩, 당…." 배우들은 메트로놈처럼 좌우로 흔들렸다. 파우스트는 메피스토펠레스와 목숨 건 내기를 한다.

3~5일 서울 LG아트센터에서 공연한 연극 《파우스트》는 인내심과의 승부였다. 공연에 앞서 "1막 50분, 2막 55분, 3막 85분으로 진행되며 15분씩 휴식이 두 번 있다"는 안내방송을 할 때부터 한숨소리를 낸 관객도 있었다. 속도가 지배하는 세상에 4시간짜리 연극이라니. 시간의 뭇매였다. 쉴 때마다 커피나 물을 사려는 줄이 길게 늘어섰고, 화장실에는 얼굴에 찬물 끼얹은 사람들이 많았다.

《파우스트》에서 그레첸(왼쪽)이 거대한 뼈다귀 위에 앉아 있다./LG아트센터 제공

《파우스트》는 한국 관객에게 익숙한 텍스트가 아니다. 리투아니아어 공연이라 자막을 봐야 하는 불편함도 있었다. 그러나 에이문타스 네크로슈스는 대사로 이야기를 전진시키는 연출가가 아니었다. 사물(objet)을 낯선 방식으로 쓰며 관객을 집중시켰다. 긴 밧줄 여러 개로 출렁이는 파동을 만들고 파우스트가 그것을 건너는 장면, 인공바람으로 거대하게 부풀어오른 와이셔츠를 몽둥이로 때리는 대목, 파우스트가 돌덩이 두 개를 탁탁 부딪치며 먼지를 들이마시는 장면에서는 객석에 탄성이 번졌다.

무대에는 새로운 시·공간이 펼쳐졌다. 연출가는 바람·연기·음악·조명 등을 똘똘 뭉쳐서 입체적인 자극을 만들 줄 알았다. 삶의 쾌락을 무엇으로 구현할지, '영원한 잠'인 죽음을 어떻게 표현할지 꿰뚫고 있었다. 숨겨놓은 쪽지 찾기, 나무로 집 짓기, 깨진 거울로 빛 반사시키기 같은 평범한 행동이 《파우스트》에서는 강력한 상징으로 돌진해왔다.

커다란 나무상자를 뒤흔드는 것 등 몇몇 은유는 해독 불가능이라 답답했지만, 대극장 연극이 없다시피 한 한국에서 네크로슈스의 화법과 뚝심은 부러웠다. 큰 무대를 채우는 것은 돈(거대한 세트)이 아니라 미학이라는 것을 증명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