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딸은 미처 몰랐다… 엄마의 빈자리가 이렇게 클 줄은

  • 박돈규 기자

입력 : 2009.03.26 03:48

연극 '엄마는 오십에 바다를 발견했다'

어둠 속에 형광 테이프들이 반짝인다. 탁탁탁 타자치는 소리가 들리고 조명이 들어오면 딸(서은경)이 보인다. 엄마(박정자)는 침대에 주검으로 누워 있다. 작가가 된 딸은 이제 기억의 힘으로 엄마를 불러낼 참이다. 살아서 불화하고 갈라졌던 모녀(母女)가 타자기와 종이 위에서 문자로 재회한다. 그러나 딸은 "내가 숨 쉬는 이 공기 속에는 엄마의 부재(不在)가 있다"고 말한다. "우리 남매는 앞으로 아무리 합쳐봐야 영원히 외톨이로 남을 것"이라며 눈물을 흘린다. 엄마란 그런 존재다.

《엄마는 오십에 바다를 발견했다》(연출 임영웅)가 24일 산울림소극장에서 개막했다. 1991년 초연 당시 8개월간 장기공연하며 5만 관객을 모은 히트작이다. 처음과 끝에 엄마의 죽음을 배치하고 출렁이는 삶으로 속을 채운 2인극이다. 초연할 때 딱 50세였던 박정자는 오미희·오지혜·우현주·정세라에 이어 이번엔 《강철》《프루프》의 서은경을 딸로 만났다.

이 연극 속 엄마는 딸자식을 걱정하는 세상의 엄마들과 다를 게 없다. 훌러덩훌러덩 옷을 벗고, 신문 펼쳐놓고 감자를 깎고, "아이고 오종(오줌) 마려워" 하면서 화장실로 뛰어간다. 볼일 보면서도 문을 활짝 열어놓고 딸에게 수다를 떤다. 엄마는 "여자의 밑천은 가슴"이라며 '뽕브라'를 빌려주고 딸은 엄마 입술에 립스틱을 발라주며 깔깔댄다. 비극을 예고하는 웃음이다.
엄마는 강하지만 약하다.《 엄마는 오십에 바다를 발견했다》의 엄마(박정자)와 딸(서은경). /산울림소극장 제공
엄마와 딸이 같이 보면 화학반응이 일어날 만한 연극이다. 훌쩍이는 여성 관객이 많았다. 자기 삶을 꿰뚫어보는 듯한 엄마의 눈길을 불편해했던 딸이거나, 딸과의 불화로 가슴 아팠던 엄마일 것이었다. 신파조의 드라마는 아니지만 엄마가 죽는 대목에서는 소름이 돋고 슬픔이 밀려왔다. 모녀가 다 마음의 밑바닥에 가라앉은 감정의 앙금들을 휘저어야 하는 배역이었는데, 어린아이 같은 생기를 보여준 박정자의 연기는 자연스러우면서 깊었다. 서은경은 몰입의 힘으로 집중력을 높여줬다. 마지막 장면에는 엄마가 검은 비닐봉지를 들고 "얘! 얘!" 딸을 부르면서 들어올 것만 같았다.

극단 산울림의 창단 40주년 기념공연 시리즈를 여는 작품이다. 이호성·이명호 주연의 《우리, 테오와 빈센트 반 고호》, 해외 무대에서도 인정받은 산울림의 대표작 《고도를 기다리며》, 이해랑 선생 20주기를 추모하는 《밤으로의 긴 여로》 등이 임영웅 연출로 이어진다.

▶5월 10일까지 산울림소극장. 모녀 관객은 할인해준다. (02)334-59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