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식 ABC] '반(反)유대주의'의 희생양 멘델스존

  • 김성현 기자

입력 : 2009.03.19 03:46

"유대주의는 우리 현대 문명의 사악한 정신이다."

1850년 독일의 작곡가 바그너(Wagner)가 악명 높은 논문 〈음악에서의 유대주의〉를 발표했습니다. '반(反)유대주의'를 공공연하게 표방한 이 글에서 바그너는 3년 전 타계한 유대인 작곡가 멘델스존(Mendelssohn· 1809~1847)을 비난의 과녁으로 삼았습니다. 멘델스존의 음악은 위대한 독일 예술이 마땅히 갖춰야 할 미덕을 결여하고 있으며 "깊이 없이 달콤하고 경쾌하기만 하다"는 것입니다.

청년 시절, 파리에서 화려한 데뷔를 꿈꿨던 바그너는 유대인 작곡가 마이어베어의 기세에 눌려 이름 석자를 알릴 기회조차 제대로 얻지 못했죠. 이 글은 독일 문화계에 싹트고 있던 반유대주의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 됩니다.

유대인을 둘러싼 예술 속의 갈등이 현실 속의 악몽으로 비화한 것은 나치의 등장과 더불어입니다. 1930년대 히틀러의 집권 이후, 나치는 유대인 작곡가의 작품 연주를 금지시킵니다. 국제 멘델스존 협회의 창설자이자 회장인 명(名)지휘자 쿠르트 마주어(Masur·82)는 "어린 시절 멘델스존의 〈무언가〉를 연습하면 피아노 선생님은 황급히 창문을 닫으라고 했다"고 당시를 회상합니다.

의식 있는 학자와 사서들은 독일 베를린의 프러시아 국립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던 멘델스존의 미발표 악보와 편지를 폴란드로 옮겨놓습니다. 하지만 1939년 독일의 폴란드 침공과 함께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그마저 세계 각국으로 흩어지고 맙니다.
멘델스존이 독일 문화의 정통 고전을 발굴하고 복원하는 데 기여했던 음악가라는 점을 상기하면 이런 현실은 아이로니컬하기 그지없습니다. '팔방미인' 멘델스존은 약관 20세 때인 1829년에 바흐(Bach)의 〈마태 수난곡〉을 자신의 지휘로 베를린에서 연주하며 바흐 복원의 불씨를 되살렸습니다. 바흐가 숨을 거둔 뒤 79년 만에 처음으로 작품이 빛을 보는 것이었죠. 독일의 최고(最古) 명문 악단 가운데 하나인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를 이끌면서 슈베르트의 교향곡 9번을 초연한 주인공 역시 멘델스존입니다. 멘델스존은 1843년 라이프치히 음악원을 건립하는 데 앞장섰고, 평생 독일의 라이프치히 시민임을 자랑스러워했습니다.

역사의 굴곡 때문인지 멘델스존은 지금도 전체 750여곡 가운데 270여곡이 출판되지 않거나 연주되지 않은 상태로 남아있습니다. 올해 멘델스존 탄생 200주년을 맞아 연주회와 음반을 통해 그의 음악을 재평가하려는 움직임이 활발합니다. 멘델스존은 9세에 피아노 연주회를 가져 일찌감치 모차르트에 비견됐고, 16세에 〈현악 8중주〉와 〈한여름 밤의 꿈〉 서곡 같은 걸작을 쓴 조숙한 작곡가입니다. 남들의 진가를 알아보는 데 팔을 걷어붙였던 멘델스존의 억울한 누명 역시 속 시원하게 벗겨지는 한 해가 되기를 기대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