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도권Ⅰ] '평택농악'에 세계가 '어얼쑤~'

입력 : 2009.03.04 03:53

대만이어 독일 터키 미국서 공연 계획
곡예에 가까운 '상모돌리기' 특히 인기
단원은 40명 불과… 10대부터 70대까지

지난 2일 오전 평택시 팽성읍 평궁리 평택농악보존회관 지하 연습실에 들어서니 북과 징, 꽹과리 소리가 흥겹게 울려 퍼졌다. 10여명 정도의 발 움직임은 경쾌했고 이들이 쓴 상모가 어지러이 연습실 안을 수놓았다. 3분 정도밖에 이어지지 않았지만 연습이 끝난 이들의 이마엔 땀이 송글송글 맺혔다. 이를 지켜보던 김용래(70) 평택농악보존회장이 고개를 끄덕이며 '잘했다'며 박수를 쳤다.

이날 연습에 참여한 이들은 평택농악보존회 상임단원들. 이들은 지난 2월 대만등불축제에서 초청공연을 가졌다. 대만등불축제는 매일 10만명이 다녀갈 정도로 대만에서 가장 큰 축제 중 하나다. 이 공연 외에도 평택농악보존회는 올 한 해 독일·터키·미국 등에서 공연을 가질 예정이다. 평택농악의 흥겨운 가락이 세계인의 주목을 받고 있는 것이다.
지난 2일 오전 평택시 팽성읍 평궁리 평택농악보존회관 지하 연습실에서 돌림법고를 연습하는 상임단원들. /김우성 기자

◆전문 연희패 성격 강해 화려한 것이 특징

평택농악은 국내 5대 농악 중 하나로 경기·충청지역을 아우르는 대표 농악이다. 다른 농악과 달리 전문 연희패의 성격이 강해 무동놀이 등이 화려하다는 점이 특징이다. 1980년 주로 걸립패(동네나 절의 경비를 마련하기 위해 집집마다 다니며 풍악을 울리고 돈이나 곡식을 얻는 무리)에서 활동했던 고(故) 최은창 선생이 여기저기서 활동하던 풍물 명인들을 모아 '평택농악'이란 이름으로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 참여, 대통령상을 받은 것이 시발점이 됐고 이후 고(故) 이돌천 선생을 거쳐 현 회장인 김용래 평택농악 예능보유자에까지 이르렀다.

김 회장은 13세 때 충청남도 천안시 용곡동 마을 두레패에서 무동으로 농악을 시작했다. 당시 걸립패를 따라 전국을 떠돌게 된 시발점이었다. 그러다 밤마다 몰래 선배의 상모를 훔쳐 배운 기술로 18세부터 상모를 돌렸다. 그때부터 최은창 선생과 이돌천 선생 등 당시 최고로 불렸던 전문 연희패와 친분을 쌓았다.

김 회장이 손을 놓아야 했던 시기도 있었다. 1974년 용인 한국민속촌 개관식 행사에 참여했던 그에게 당시 천안에 있던 아내가 찾아와 집에 오지 않으면 자기가 집을 떠나겠다고 말했다. 그때부터 4년간 그는 친척이 운영하는 탈곡기 공장에서 일했다.

그러나 한번 맛들인 '무대의 유혹'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그는 탈곡기를 고쳐줘야 한다는 핑계로 종종 다른 지방으로 가 공연을 하고 돌아오곤 했다. 그러던 1982년, 그는 평택농악에 합류했고 2000년 예능보유자로 지정됐다.



◆평택농악, 연령대도 다양해

현재 평택농악보존회 단원 수는 40명이 넘는다. 10대부터 70대까지 연령대도 다양하다. 이 중 상임단원 수는 10명. 이들은 매주 5일간 오전 9시부터 오후 1시까지 연습한다. 그 이후엔 개인 연습이다. 연 평균 100회 공연을 하는 걸 감안하면 거의 쉬는 날이 없는 셈이다.

엄성현(27)씨는 초등학교 4학년 때 풍물반에 들어 최은창 선생에게 배운 것이 계기가 돼 상임단원이 됐다. 무동으로 시작한 그가 지금 맡고 있는 것은 법고. 처음엔 그저 용돈 받는 것이 좋아 공연장을 쫓아다녔다. 1980년대 후반 당시 한번 공연에 참여하면 1만원~1만5000원을 받았다.

그러던 그가 평택농악을 직업으로 고민한 것은 군대 있을 때다. 자동차 관련학과를 다니던 엄씨의 고민이 멈춘 것은 부모님의 전폭적인 지지가 있기 때문에 가능했다. 엄씨는 "내가 전통음악을 한다는 것에 대해 부모님이 무척 자랑스러워하신다"며 "나 역시 아프다가도 날 생생하게 만드는 공연의 힘에 푹 빠져있다"고 말했다.

장고를 맡은 황영길(41)씨는 엄씨에 비해 늦게 시작한 편이다. 그는 대학 풍물동아리에서 활동하다 풍물의 매력에 빠져 아예 대학을 중퇴했다. 풍물꾼을 찾아 전국을 돌아다니던 그는 천안에서 이돌천 선생을 만나 그의 제자가 됐다. 그러나 이후가 문제였다. 부모님이 극구 반대했던 것. 거의 집에서 쫓겨나다시피 한 그는 아예 선생님 집에 묵으며 장고를 배웠고 2005년부터 상임단원으로 활동했다.

이들이 한달 받는 평균 액수는 100만~150만원. 자녀가 있는 황씨에겐 많지 않은 액수다. 그러나 그는 "전통음악을 지켜야 한다는 사명의식으로 시작했는데 요즘은 배우면 배울수록 무궁무진한 장단에 도전의식이 생긴다"며 "뼈를 묻는다는 생각으로 몰두하고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