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식 ABC] 악보를 외우고 연주해야할까

  • 김성현 기자

입력 : 2009.03.02 02:48

러시아의 명피아니스트 스비야토슬라브 리히터는“하이든의 소나타를 외워서 두 곡만 연주하느니, 악보를 보면서 20곡을 연주하는 편이 낫다”고 말했다. /도서출판 정원 제공
클래식 연주회장에 가면, 친숙하면서도 낯선 풍경을 하나 볼 수 있습니다. 같은 음악 공연인데도 장르나 연주자에 따라 악보를 들고 입장하기도 하고, 미리 외우고 암보(暗譜)로 연주하기도 하는 것이지요.

보편적 공식은 없지만, 대략적 경향은 존재합니다. 이를테면 오케스트라 단원들은 악보를 넘기며 연주하지만, 지휘자나 협연자는 악보를 외워 오는 경우가 많습니다. 같은 피아니스트라도 독주회를 열 때는 암보를 하지만, 반주를 할 때는 곁에서 악보를 넘겨주는 페이지 터너(page turner)와 함께 들어옵니다. 고전 작품에선 암보가 미덕으로 통하지만, 현대 음악에서는 열심히 악보를 보면서 연주해도 무방합니다. 실내악에서는 연주자들이 악보를 보는 것이 상례입니다.

악보를 외우고 연주한다는 것은 작품을 꿰뚫고 있다는 자신감의 표현입니다. 지휘자나 독주자에게는 일종의 신비감과 카리스마를 북돋아주는 장치가 되기도 합니다. 지휘자 사이먼 래틀이 리허설을 하는 광경을 보면서 "수십만개의 음표로 구성된 건축물 같은 말러의 교향곡 9번에서 몇 개의 음표를 즉시 끄집어내고 다듬어서 다시 제자리에 돌려놓는 건 비상한 기억력을 필요로 한다"고 묘사한 구절이 그렇습니다.

오늘날 독주회를 뜻하는 리사이틀(recital)이라는 단어 자체가 바로 '암송하다(recite)'는 어원에서 비롯했습니다. 음악사에서 다른 작곡가의 작품을 전문적으로 연주하는 리사이틀의 창시자는 흔히 리스트(Liszt)로 꼽힙니다.
"리스트가 피아노를 연주하면 숙녀들은 무대 위로 꽃다발 대신 치장하고 있던 보석을 던졌다. 무아경 속에 비명을 질렀고 기절하는 일도 종종 있었다. 기절하지 않은 숙녀들은 미친 듯이 무대로 뛰어올라가 리스트가 피아노 위에 얹어놓은 초록 장갑을 차지하려고 싸우곤 했다. 어떤 숙녀는 리스트가 피운 담배꽁초를 죽는 날까지 가슴 속에 품고 다니기도 했다."

뉴욕 타임스의 간판 칼럼니스트로 활약했던 해럴드 숀버그의 《위대한 피아니스트》(나남) 가운데 한 구절입니다. 당시 파가니니(바이올린)나 리스트(피아노)는 연주자로서 오늘날 팝 스타 못지않은 인기와 위세를 누렸지요.

하지만 20세기 러시아의 전설적 피아니스트 스비야토슬라브 리히터(Richter) 같은 이는 반드시 암보를 해야 할 필요성에 대해 의문을 제기합니다. "악보를 무조건 다 외우려는 것은 건강에 해로울 뿐만 아니라 허영심의 발로이기도 하다. 하이든의 소나타를 암보하는 것은 쉬운 일이지만, 외워서 연주하느라 두 곡에 그치기보다는 악보를 보면서 20곡을 연주하는 편이 낫다"는 것입니다.

신의 목소리를 우리에게 대신 전달해주는 사람이 사제(司祭)인 것처럼, 연주자는 악보에서 작곡가의 원뜻을 찾아내 관객에게 들려줍니다. 연주자의 악보가 사제의 경전에 해당한다면, 중요한 것은 경전에 담긴 뜻이지 자구(字句)는 아닐 겁니다. 이런 뜻에서도 암보는 의무 사항이라기보다는 권장 사항에 가깝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