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관객에 내보인 추상적 조형의 속살

  • 임근준 미술평론가

입력 : 2009.03.02 02:39

성낙희 개인전 ≪옮김(translation)≫

성낙희(38)의 회화는 무한 증식하는 추상적 조형의 세계를 실험하는 것으로 이름이 높다. 작품마다 점이 되고, 선이 되고, 면이 되는 색채의 덩어리가 등장해 화면을 분할 점거하는데, 각 기본 단위에는 모종의 유전적 프로토콜이 설정된 듯 보인다.

그림은 팝 음악처럼 감상해도 좋다. 비유하자면 이렇다. 처음 들을 때는 분석적인 사고를 동원하지 않은 채 작품이 전달하는 전체적인 인상에 주목하고, 두 번째에선 보컬의 멜로디를 따르고, 세 번째에선 기타 사운드의 채널에 집중한다. 네 번째에선 키보드의 트랙을 가려 듣고 다섯 번째에선 베이스 라인에, 그리고 여섯 번째에선 타악기의 역할에 주의를 기울인다. 그다음엔 부가적인 채널들이 기본 구조에 언제 어떻게 붙었다 떨어져 나가는지 살핀다. 처음에는 잘 포착되지 않았던 전체적인 사운드의 조형적 구조가 머릿속에 그려진다.

성낙희의 작품〈사다리타기〉./ 갤러리2 제공

제7회 개인전 ≪옮김(translation)≫에서 작가가 공개한 신작은 다소 야릇하다. 입구·도약·정주·응집·유출·소용돌이·반향·잔향·음조 등의 이름을 얻은 작품들은, 성낙희식 회화의 대위법 기초를 (다시금 그림으로) 예시하는 다이어그램 노릇을 맡는다. 지금까지 일군 추상적 회화의 소우주가 스스로 해설하는 셈이다.

작가는 '보는 이 중심의 그림'을 만들고자 애썼다. 전시 제목도 ≪옮김≫으로 했다. 사람들이 쉽게 그림을 읽고 해석할 수 있도록, 신작들은 정면성을 띤 채 관객을 마주 본다. 작가는 "결국 그림이 무척 납작해졌다"라고 말한다.

2002년 시작된 이 새로운 회화의 여정은 이제 제1막을 마무리하는 데 도달한 듯하다. 종이 위에서 태어난 성낙희의 원시 생명체 같은 색형은, 갤러리 벽면과 캔버스를 가리지 않고 성장 질주하더니, 어느덧 저 자신의 특성을 반추하고 해설하는 단계로 진화했다.

관람 포인트 가운데 하나는 중력이다. 하나는 진짜 중력이고, 또 다른 하나는 화면 위(속)에서 가상적으로 작동하는 회화적 중력(혹은 인력)이다. 보기 좋게 흘러내리는 물감의 자국이 지시하는 중력 말고, 작업의 중간 과정에서 그림에 작용한 다양한 중력을 유추해보자. 그러면 그림이 빙글 돌고, 바닥에 누웠다가, 다시 벽면에 붙어 '나'를 마주하는 신비한 경험을 할 수 있다.

전시는 청담동 갤러리2에서 3월 28일까지. (02)3449-21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