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중근, 안중근을 만나다

  • 뤼순·하얼빈=박돈규 기자

입력 : 2009.02.19 03:22

뮤지컬 '영웅' 주연 류정한·정성화, 의거 현장 방문
"가슴 벅찬 감동… 내가 이 영웅을 감당할 수 있을까"

감옥 안의 겨울은 더 추웠다. 지난 16일 중국 다롄(大連)의 뤼순(旅順)감옥. 뮤지컬 배우 류정한(38)과 정성화(34)는 형장 앞에서 찬 바람을 맞으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1910년 3월 26일 안중근 의사(1879~1910)가 용수(밖이 안 보이게 머리에 씌우는 통)를 쓴 채 형장으로 가는 동안 한 번쯤 눈에 담고 싶었을 그 하늘이다. 이날은 구름 한 점 없이 푸르렀다.

두 배우의 방문은 여느 관광객과 달랐다. 류정한·정성화는 안중근 의거 100년을 맞는 올해, 거사일인 10월 26일 LG아트센터에서 개막할 뮤지컬 《영웅》에서 안중근 역을 나눠 맡는다. 류정한은 "보면 볼수록 머릿속이 텅 비는데 무대에서 내가 이 영웅을 견뎌낼 수 있을지 두렵다"고 했다. 정성화는 서예 도구가 있는 독방, 고문 기구들, 교수대 등 안중근의 흔적을 묵묵히 카메라에 담았다. 배역에 다가갈 때 쓸 사진들이다.

안중근이 '한국 명성황후를 시해한 죄' 등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저격한 이유 15가지를 당당히 밝혔던 옛 관동고등법원은 뤼순감옥에서 차로 5분 거리였다. 두 배우와 《영웅》의 연출가 윤호진, 작곡가 오상준, 안무가 이란영 등 일행은 '忍耐(인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는 안중근의 영정에 분향했다. 수의를 입고 법정에서 사진촬영을 한 류정한은 "가슴이 벅차오르면서도 나 자신이 부끄러웠다"고 했고, 정성화는 "안중근 의사가 영웅으로 기억되는 건 이토를 사살해서가 아니라 감옥과 법정에서 보여준 의연함 때문인 것 같다"고 말했다.
뮤지컬《영웅》에서 안중근 역을 맡는 배우 류정한이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이유를 당당하게 밝혔던 관동고등법원에 앉아 있다(왼쪽), 배우 정성화가 뤼순감옥 2층에 서있다. 그는“안중근 의사가 더 크게 보인다”며“인간적인 모습을 발견할 수 있어서 좋았다”고 말했다(오른쪽). /에이콤 제공
《영웅》 대본의 후반부, 안중근은 담뱃불을 붙여주는 간수에게 "시간이 다 되어가는 모양이군. 불을 붙이는 자네 손이 떨리는 걸 보니" 하고는 큰 붓을 들어 쓴다. '위국헌신 군인본분(爲國獻身 軍人本分·나라를 위해 몸을 바치는 것은 군인의 본분이다)'. 정성화에게 강렬하게 남은 장면이다. 류정한은 "안중근 의사가 형장으로 가는 아침, 어머니가 지어 보낸 수의를 입으면서 어머니가 불러주는 자장가를 듣는 대목에서 눈물을 쏟았다"고 했다.

《명성황후》의 에이콤이 제작하는 《영웅》은 안중근의 단지(斷指)동맹으로 열려 죽음으로 닫힌다. 안중근을 돕는 명성황후의 마지막 궁녀, 안중근과 중국 여인의 러브스토리 등 허구로 재미를 더했다.

류정한·정성화는 500여명이 경합한 오디션을 뚫었다. 《지킬 앤 하이드》 《스위니 토드》 등을 거친 류정한은 폭발적인 가창력과 에너지가 강점. 집념과 인간미가 배어나오는 정성화는 《맨 오브 라만차》를 통해 개그맨에서 뮤지컬 배우로의 전업에 성공했다. 창작 뮤지컬에 처음 도전하는 류정한은 "안중근이 동지들과 합창하는 1막의 마지막 노래 〈그날을 기약하며〉, 주제가라고 할 수 있는 아리아 〈영웅〉을 듣고 감정의 방아쇠가 당겨지는 전율을 느꼈다"고 했다.

17일 오후 두 배우는 하루 200여편의 열차가 지나는 하얼빈(哈爾濱)역에 닿았다. 안중근이 이토를 저격한 자리는 바닥에 삼각 무늬 타일로만 표시돼 있었다. "이토를 확인한 뒤 총탄 세 발을 명중시키고 '대한민국 만세'를 외친 그 짧은 순간 어떤 심정이었을지 생각했다"는 정성화는 "미래를 바꿔줄 영웅은 기다리면서 정작 오늘의 우리를 있게 한 영웅은 잊고 있었던 것 같다"고 했다. 기적이 울렸다. 목단강(牧丹江)으로 가는 17시44분 열차가 들어오고 있었다. 이날 영하 18도까지 내려간 하얼빈에서 류정한은 "몸은 추워도 가슴은 뜨끈하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