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ekly chosun] 쉴 틈이 어딨어… 변하지 않으면 추락이야!

  • 이규현 아트저널리스트
  • 사진 = 이경호 조선영상미디어 기자

입력 : 2009.02.13 16:27 | 수정 : 2009.02.15 21:56

'묘법시리즈’ 화가 박서보
종일 韓紙 위에 긋고 또 긋고
<이 기사는 weekly chosun 2043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훔친 간장으로 그림 그리며 공부
양 팔엔 물감 독 오른 상처 가득


앵포르멜에서 묘법시리즈까지
한국 추상미술의 산역사


홍익대 앞에 있는 화가 박서보(78)의 스튜디오로 가면서 긴장과 흥분이 교차했다. 서성록 한국미술평론가협회장은 저서 ‘박서보: 앵포르멜에서 단색화까지’(재원)에서 “그(박서보)를 빼놓는다면 한국 현대미술의 연표작성이 불가능할 정도로 그가 미친 영향은 아주 크다”라며 “그는 나같이 애송이 글쟁이가 다루기에는 벅찬 인물”이라고 썼다.


하물며 30대 후반의 글쟁이인 내가 이런 대가와 어떻게 분위기를 맞출 수 있을까? 내심 걱정을 하며 주위를 둘러보는데 박서보의 스튜디오가 한눈에 들어왔다. 건물 외벽에 질서정연하게 늘어선 검은 줄무늬. 바로 박서보 추상화를 대변하는 ‘묘법 시리즈’를 건물에 그대로 입힌 것이었다.

박서보는 78세라는 나이가 믿기지 않을 만큼 정열이 넘치는 화가다.

안으로 들어가니 “계단 따라 올라오세요!” 하는 박서보의 큰 목소리가 들려 깜짝 놀랐다. 가파른 계단 위는 2층 사무실, 사무실 옆으로는 작업실 2층이 이어진다. 올라온 계단의 반대편으로 내려가면 직사각형 모양의 널찍한 작업실 1층이다. 양 끝에 테라스 같은 2층 공간이 붙어 있으니 대작 수십점을 걸 수 있는 멋진 전시장이나 다름없다.


“내가 죽은 다음에 전시를 할 수 있도록 작년에 작업실 개조공사를 했어요. 내가 언젠가 죽는다는 사실만큼은 틀림없잖아.”


쩌렁쩌렁 작업실에 울려 퍼지는 목소리 때문에 ‘죽을 때가 가까워왔다’는 그의 말은 조금도 곧이 들리지 않았다. 반대편 2층 테라스에는 길이 50m짜리 캔버스 15롤이 쌓여있다. 캔버스 750m라니, 생각만 해도 많다. 1층 작업실엔 닥종이 여러 장이 물 대야에 푹 담겨 있다. 한 번에 5000장을 주문했단다. 빳빳한 닥종이가 물 속에 10일 이상 담겨 흐물흐물해지면 캔버스 위에 붙여서 작업을 한다. 크지 않지만 단단한 체구인 박서보는 양쪽 팔에 단단하게 알이 뱄고 팔뚝에는 흉터가 점처럼 수도 없이 많다. 양동이에 물감을 부어 맨팔로 휘젓는 바람에 화학 성분 독이 올라 생긴 상처다.



웬만한 사람은 기운 달려서 작업 못하겠어요. 그림 그릴 때 제일 중요한 게 무엇인가요? “나는 남하고 달라지기 위해서 그려요. 그걸 확보 못하면 있을 필요가 없어요. 홍익대 교수 시절, 제자들이 볼 수 있도록 내 작업실 입구에 세 가지를 적어 두었어요. 네 스승을 닮지 마라, 역사로부터 빚을 지지 마라, 너희들끼리 닮지 마라. 그림은 수신(修身)의 도구예요. 수신의 찌꺼기 이상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런데 이미 있었던 어떤 화가나 어떤 경향과 비슷하다면 있을 필요가 없잖아요.”

캔버스 위에 한지를 붙이고 찢어 밭고랑 같은 선을 만드는 박서보의 '묘법시리즈'. photo 박서보
박서보는 1954년 홍익대 회화과를 졸업하고 1962년부터 1997년까지 회화과 교수를 했다. 작업실은 조금씩 이사를 다녔지만 홍대 근처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현재 작업실은 1997년에 지었다.


이 동네에서 평생을 보내셨네요. 학생 때 얘기 좀 해주세요. “아, 정말 가난했지요. 전쟁이 끝나도 전쟁 상태였어요. 집이 파산해서 등록금 내줄 사람이 없었어요. 그때 반도호텔(지금 롯데호텔) 근처에 아사원이라는 4층짜리 중국집이 있었는데 점심 시간만 되면 그리로 뛰어갔어요. 점심 먹으러 오는 미군들 붙들고 ‘스케치 해줄게’하면 양공주하고 같이 온 미군들은 대개 그리라고 해요. 여자 앞이니까. 그렇게 번 돈을 회현동 달러상한테 가서 한화로 바꾼 다음에 동대문시장 가서 꿀꿀이죽으로 저녁을 먹는 거예요. 학교 앞에 평양집이라는 냉면집이 있었어요. 가끔 너무 배가 고파서 들르면 선배들이 냉면을 한 그릇씩 사주는데, 나올 때 간장병을 몰래 훔쳐 나왔지요. 간장병이 무식하기 그지없는 유리 주물이었는데 종이로 싸서 주머니에 넣고 가져와서 간장으로 드로잉을 했어요.”



간장으로 그림을 그려요? “그때 그림 재료가 지금처럼 있었나요? 태어나 처음 유화를 그린 건 미군 레이션 박스였어요. 홍익대에 처음엔 동양화 전공으로 입학했는데 피란 시절 부산 국제시장으로 캠퍼스를 옮기고 난 뒤 서양화로 전공을 바꿨어요. 그런데 캔버스 살 돈이 없으니, 만날 미군부대 있는 산골짜기 쓰레기장에 갔지요. 거기에 미군들이 레이션 박스를 버렸거든요. 미제 레이션 박스는 전쟁 때 헬리콥터에서 투하해도 해체되지 않아야 했기 때문에 두꺼운 종이를 콜타르로 붙인 거라 질겨요. 가위 들고 거기 가서 레이션 박스를 잘라 가져다가 그 위에 그림을 그린 거예요. 그래서 전 지금도 학생들한테 뭐든 가지고 그리면 된다고 말해요. 유화여야만 한다, 캔버스여야만 한다, 그건 틀린 생각이에요.”



그런 시절에 예술 하는 건 정말 힘든 일이었네요. “하지만 가난 또는 궁핍은 창조의 어머니라고 생각해요. (프랑스 조각가) 세자르는 가난하기 그지없어서 고철 쓰레기로 최고의 예술작품을 만들 수 있었어요. 만일 세자르에게 경제적 여유가 있었다면 편안하게 실내 스튜디오에서 모델 모습을 흙으로 빚고 석고로 뜨는 전통적 조각에 얽매였을 거예요. 하지만 세자르에게는 그럴 돈이 없었고 예술가로서의 욕구와 열정은 터져나가니까 고물 용접하는 조각을 하게 된 거죠.”



세자르나 선생님이나 모두 가난 속에서 예술을 했는데 비싼 작가가 되었네요. “제 그림 비싸진 거 얼마 안 됐어요. 1980년대 후반 전시 때 연필로 그린 묘법 100호가 300만원인데도 안 팔렸는 걸요. 그때 다른 화가들은 불티나게 팔리고 있었는데 나는 손가락 빨면서 보고만 있었지요. 1990년대 초부터 조금 팔리는가 하더니 묘법 화풍이 직선이 되면서 색깔이 까매지니까 다시 안 팔리더군요. 하지만 지금까지 그림 판다는 것을 한 번도 의식한 적은 없어요. 아마 그래서 용감하게 늘 화풍에 변화를 줄 수 있었을 거예요.”



한국 추상화의 대가 박서보가 1962년 첫 개인전에서 선보인 ‘원형질 시리즈’는 우울하다. 잘려나간 인체나 생물체를 떠올리게 하는 불편한 이미지가 검은 톤으로 무겁게 그려진 게 그의 첫 대표작이었다.



원형질 시리즈는 무엇을 의미했나요? “검은 숨결이 헐떡거리는 인간상을 표현한 것이었어요. 전쟁의 외마디, 총 맞고 숨이 끊어질 때 ‘어머니!’ 하고 부르짖는 절호를 표현해보고 싶었어요.”



세계 어디에서나 전쟁 세대 화가들은 울부짖었다. 2차 세계대전 후 유럽에서는 기존사회와 화풍에 대한 반항으로 격정적인 추상화 ‘앵포르멜(Art Informel)’이 생겨났고, 미국에서는 형체가 완전히 없고 작가의 주관에만 맡기는 감정적 추상표현주의가 나와 전후 미술을 대변했다.



선생님의 추상화도 앵포르멜이라 할 수 있나요? “달라요. 서양의 앵포르멜은 구질서를 파괴하면서 새로운 질서를 만든 것이었어요. 그런데 우리는 모든 것을 파괴하는 미술이었어요. 캔버스가 자기를 갈기갈기 찢어 내동댕이치는 마당이었던 거지요.”



이후 1970년대부터 그는 형태를 완전히 없애고 고요한 사색의 분위기를 만드는 ‘묘법(描法) 시리즈’를 그리고 있다. 연필로 빗금을 수없이 긋는 작업, 한지 위에 연필심으로 긁는 작업, 한지 위에 밭고랑처럼 줄줄이 선을 만드는 작업 등으로 스타일은 변해왔지만, 그때마다 인정 받으며 묘법 화가로서 우리 미술사에 자리매김했다.



묘법 시리즈는 어떻게 나오게 됐나요? “서양의 현대미술을 배울수록 우리 것은 무엇이냐, 나는 누구냐를 반성하게 됐어요. 그래서 동양고전을 공부하다 깨우쳤어요. 담는 것보다 비워내는 게 충만하다는 것을. 그런데 깨닫고 나니 그걸 그림으로 어떻게 실현해야 하는지 모르겠더군요. 비워내는 것을 어떻게 그리나? 아무것도 안 그리나? 그때 우리 둘째가 답을 줬어요. 그 놈이 네살 때였죠. 초등학교 2학년인 형의 국어 노트를 가지고 격자마다 글자를 써 넣다가 글자가 칸 밖으로 튀어 나가니까 고무로 막 지우는 거예요. 그런데 지우는 기술이 없어서 잘 못 지우겠으니까 화가 나서 종이에 빗금으로 막 그어 대는 거예요. 그리는 것을 체념한 거죠. 그때 깨달았어요. 바로 이거다.”



그런데 묘법 시리즈도 계속 변화했습니다. “대개는 변화하면 추락할까봐 겁나서 변화 못하는데, 변화하지 않으면 추락하는 거예요. 현대미술의 위기는 자기가 자기를 모방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치열하게 사시는 것 같아요. “맞아요. 난 단풍 구경도 한 번 다닌 적이 없어요. 사람 많은 곳도 싫지만, 일 하느라 다른 짓 할 시간이 없었어요. 마지막까지 소진하다 가고 싶어요. 내가 되살아 나온다는 자신이 없거든요. 그러니까 지금 최선을 다해 살다 가야지요. 내세가 있다면 다시 예술가로 태어나고 싶지는 않아요. 문화건달로 태어나서 그땐 남의 작품 보고 사면서 즐기는 삶을 살고 싶어요.”

| 박 서 보 |  현대미술의 역사가 짧은 우리나라에서 박서보만큼 역사적 위치를 확보한 화가도 드물다.


흔히 미술이론가·평론가들이 인정하는 작가와 대중이 좋아하는 작가는 구분되는데 박서보는 드물게 양쪽에서 다 인기가 좋다.


그는 1950년대에 ‘원형질’이라는 추상화 시리즈로 전후(戰後)의 피폐한 사회를 표현한 한국적 앵포르멜을 이끌었고, 1970년대엔 모노크롬(단색) 회화, 형태를 완전히 덜어낸 ‘묘법 시리즈’로 한국을 대표하는 추상화가로 자리매김했다.


1956년 ‘4인전’을 열면서 전시장 앞에 국전의 보수화를 지적하는 ‘반(反)국전선언’을 붙이는 등 우리 현대미술 역사의 산증인이기도 하다. 세계적 미술출판사인 ‘아술린(Assouline)’에서 올해 그의 작품집이 나온다.

  • C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