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야구장에 간 피가로… 짜임새 있는 타선의 승리

  • 김성현 기자

입력 : 2008.12.29 03:10

국립오페라단 '피가로의 결혼'

귀족 집안이라는 원작 배경을 야구장으로 옮겨놓은 오페라《피가로의 결혼》. /국립오페라단 제공
막이 열리면, 등 번호 18번이 찍힌 야구 유니폼을 입은 주인공 피가로(베이스 손혜수)가 그라운드에 엎드려 열심히 치수를 재고 있다. 알마비바 백작의 노골적 구애에 시달리는 약혼녀 수잔나(소프라노 손지혜)는 가벼운 청바지 차림으로 나타나 속사정 모르는 피가로를 탓한다.

28일 서울 석관동 한국예술종합학교 예술극장을 찾아간 국립오페라단의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모차르트 작곡)은 이렇듯 복잡한 사랑 방정식의 무대를 야구장으로 옮겼다. 교묘하게 경기 규칙을 넘나들며 치열하게 공격과 수비를 주고받는 건 사랑이나 야구나 마찬가지다.

야구장 버전의 《피가로의 결혼》은 적재적소(適材適所) 캐스팅의 승리이기도 했다. 부지런히 무대를 뛰어다니며 드라마를 재기 발랄하게 이끌어간 수잔나 역의 소프라노 손지혜는 물론, 느끼하면서도 음흉하게 알마비바 백작을 소화한 바리톤 사무엘 윤과 코믹 연기로 객석에 연방 웃음을 불어넣은 바르톨로 역의 베이스 함석헌까지 주연·조연 가리지 않고 전체 배역에 치수가 꼭 들어맞았다.
특히 케루비노 역을 맡은 카운터테너 이동규는 사랑의 그라운드를 마구 휘저으며 사춘기 악동 역을 감칠맛 나게 전달했다. 보통 10대 소년의 이 역할은 여성 성악가가 맡기 때문에 '바지 역할'로도 불리지만, 훈련을 통해 여성 음역까지 소화하는 남성 카운터테너에게 맡긴다는 '역발상의 역발상'이 빛났다. 사실상 현재 국내 오페라 무대에서 찾을 수 있는 최상급 캐스팅 덕택에 모차르트 오페라가 지니고 있는 치명적 매력인 실내악 앙상블의 묘미가 제대로 살아났다.

국립오페라단 예술감독이면서 직접 '감독 겸 선수'로도 뛰어든 연출가 이소영은 다양한 소도구와 멀티미디어를 통해 '오페라는 가만히 서서 노래하는 것'이라는 고정관념을 마구 뒤흔들었다. 대사 전달이 주목적인 레치타티보(recitativo)는 휴대전화 통화로 처리했고, 이중창에서 빨래 통을 사이에 놓고 실랑이를 벌이거나 백작에 대한 분노를 강속구 던지는 폼으로 형상화한 대목도 재기 넘쳤다.

특히 전광판에 백작의 일그러진 표정이 중계되고 대형 깃발로 열띤 응원전을 벌이는 가운데 아리아 《더 이상 날지 못하리》를 부른 1막 마지막 대목에서 위트도 절정에 이르렀다. 보수적인 음악 팬들은 장난끼가 심하다며 눈살을 찌푸릴 수도 있지만, 젊은 관객과 오페라의 눈높이 맞춤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적지 않았다.

또 하나의 숨은 주인공은 무대 아래의 피트(pit)에서 연주한 오케스트라였다. 정치용이 지휘한 크누아(KNUA·한국예술종합학교) 오페라 오케스트라는 당대 연주의 영향을 받은 듯 서곡부터 군더더기 없이 간결하고 날렵하게 드라마를 이끌었다. 30일까지. (02)586-528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