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지 않은 길'을 위한 랩소디

  • 성남문화재단
  • 글=송준(저널리스트)

입력 : 2008.12.19 15:15

가수 겸 화가 정미조 화백

화가 겸 가수 정미조/사진=성남문화재단, 정형우

정미조 : 화가. 비디오아티스트. 수원대 미대 교수. 70년대에는 10대 가수를 연례행사로 치른 톱가수였다. 인기 절정에서 고별무대를 끝으로, 프랑스 파리 유학. 국립장식미술학교를 마치고 파리 7대학에서 '한국의 무신도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모두 21차례 개인전을 가졌고, 국제그랑프리에 5차례 입ㆍ당선하였으며, 2007년에는 한국미술문화상을 수상했다. 가수로서는 14장의 음반을 발표했고, 1978년 ‘제9회 야마하도쿄국제가요제’에서 ‘아, 사랑아’로 최우수 가창상을 수상한 바 있다.

하늘에는/ 새가/ 잘 다니는/ 길이 있고// 그리고/ 하늘에는/ 큰 나무의 가지들이/ 잘 뻗는/ 길이 있다// (하략, 오규원 '길' 일부).

도처에 길이 있다. 보이는 것만 길이 아니다. 꼭 시인의 가르침이 아니어도, 마음 있는 자는 안다. 강은 물 떠나는 길이고, 계곡은 바람 달리는 길이다. 나무는 몸이 길이다. 초록의 살과 살을 맞대어 만든 길이다. 체관부를 통해 빛 알갱이가 뿌리에 닿고, 물관부를 따라서 대지의 기운이 하늘로 오른다.
영혼은 영혼의 길이 있고, 시간은 시간의 길이 있다.

정미조 화백(수원대 미대 교수)의 최근 전시 '영혼들2008'은 흡사 ‘영혼과 길의 묵시록’쯤 되는 묵직한 이야기로 읽혔다. 몇 점의 컬러 소품을 제외하고는 작품 거개가 흑과 백의 묵시록이다. 흰 캔버스 위에 빠른 속도감의 먹빛 붓질이 시간의 길을 달리다 멈춘 듯한 그림들. 혹은 영혼의 형상 같고, 혹은 기억의 시니피앙쯤으로 보이는 먹빛 형체들의 잔영이 바쁘다.

전시장부터가 길이다. 서울 홍릉에 위치한 KAIST SUPEX Hall의 2층. 교차하는 계단과 복도 사이, 그 사각의 모서리 네 곳이 갤러리 공간이다. 조용조용 화폭을 음미하는 여느 갤러리와는 맛이 완전히 다르다. 올해 초 한 큐레이터로부터 전시 제안을 받았다. 당시 정화백은 지난해의 전시 '어둠 속의 전율'의 연장이자 확장인 작업을 하고 있었다. 얼핏 비슷해 보이지만 올해의 작업은 작년의 것에서 윤기를 더욱 매섭게 생략한 골기(骨氣)와 형해(形骸)만으로 빚은 막다른 상상의 어느 경계쯤이랄까. 그런데 장소를 살펴보니 분위기가 만만치 않았다. 미술관치고는 심하게 터프한 공간이다. 생각이 많아졌다. 구석구석 치수를 재고, 구상을 새로 했다. 그래서 태어난 것이 840호 대작 <영혼의 나무>다.

수원대 미대 교수 정미조 화백/사진=성남문화재단, 정형우
2층 계단을 올라서면 2시 방향에서 '영혼의 나무'가 바로 시선을 맞는다.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라스트신, 불굴의 여인 스칼렛 오하라의 영혼의 고향 타라의 그 거대한 고목을 연상케 하는 나무 그림이다. 천년을 건너온 광음(光陰)의 기억이 가지와 가지 사이에 속도감으로 매달려 있다. 자세히 보면 나무는 여인들의 집합이다. 여인의 몸을 원용한 영(靈)의 몸짓과 몸짓이 서로를 부여잡고 나무를 이루고 있다. 여인의 몸은 한 세대를 단위로 한 시간의 길이이자 인연의 길이이다. 그 길이의 토막들이 서로 부둥켜안았으니, 저 나무 또한 길이다. 시간의 길이요, 인연의 길이다.

길은 길로 이어져 끝이 없느니. 길을 끝내는 것은 걸음을 멈추어 세우는 스스로의 뜻일 뿐. 정미조는 머물지 않는다. 그림에 관한 한 정착하지 않는다. 정미조만큼 그림의 기법과 스타일을 간단없이 계속 바꿔온 화가들도 많지 않다. 파리 유학 초기의 야경 그림에서 80년대 중반의 붓 시리즈로, 그리고 다시 영(靈)의 세계로, 스크래치 기법에 판화 기법에 스트라이프 기법으로, 그 다음 빛의 변주를 거쳐 지금에 이르기까지 참으로 부단한 모색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그 모색의 각각이 나름의 봉우리를 이루었으니, 그 성취가 결코 작은 것이 아니었으니.
  • C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