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남자 눈에 비친 '한국 여자로 산다는 것'

  • 박돈규 기자

입력 : 2008.12.18 03:32

윌 컨씨가 극본 쓴 연극 '엄마열전'

연극《엄마열전》의 여배우들. 왼쪽부터 정예진, 신혜경, 이지현, 전혜진, 김수정. /차이무 제공
연극 《엄마열전》(연출 민복기)의 무대는 탁 트인 옥상이다. 민씨 집안의 며느리 다섯 중 넷이 김장을 하러 모였다. 배우들은 실제로 무채 만들고 파 썰고 양념을 바르며 김장을 한다. 중간에 청요리도 배달시켜 술 안주로 먹는다(소주는 맹물, 맥주는 진짜다).

화제는 짐작대로 '민씨 집안 흉보기'다. 마침 이날 김장에는 둘째 며느리의 딸 예진이가 가족 스토리를 영작해오라는 숙제 때문에 따라붙었다. 캐묻지 않아도 가슴에 묻어뒀던 이야기들을 꺼내놓을 참이다. 그들은 먼저 이름을 되찾는다. 맏며느리 박일홍(신혜경), 둘째 방순덕(이지현), 넷째 구상노(김수정), 막내 김수현(전혜진)이다.

"딸이 왜요? 한국에서 세계적인 건 다 딸들이 했어요. 김연아, 장미란, 박세리, 양궁, 핸드볼. 확실히 우리나라는 여자가 쎄!"
굳이 대사로 이렇게 표내지 않아도 《엄마열전》은 통째로 여자 이야기다. 작가는 미국인 윌 컨(Kern). 한국에서 다양한 계층의 여자들을 인터뷰해 희곡을 썼다. 엄마의 딸이자 남자의 아내이고 아이의 엄마이자 시어머니의 며느리인 아줌마 넷의 수다는 각자 추억의 한두 토막이 무대에서 재생되면서 연극적인 재미를 더한다.

고된 시집살이, 시집가기 전날 엄마가 흘린 눈물, 가난했지만 낭만이 있었던 학창 시절, 지하철 성추행, 폐경과 우울증, 남편의 바람기, 이혼과 재혼…. 며느리들은 웃고 운다. 울 때는 양파 핑계를 댄다. 이들의 수다로 연극 한 편이 완성됐고, 한국 여자들의 삶은 누구나 그럴싸한 '소설'에 가깝다는 점을 입증한다. 남자 배우 한 명의 다역(多役) 연기가 웃음을 준다. 잔잔한 호수를 닮은 이 연극에서 통통 튀는 물수제비 같다.

▶31일까지 예술의전당 자유소극장. 멀티맨은 최덕문·정석용·오용이 번갈아 맡는다. (02)747-1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