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식ABC] "내 작품, 내가 좀 베끼겠다는데!"

  • 김성현 기자

입력 : 2008.12.04 03:23

작곡가들의 자기 복제·자기 패러디

지난 2006년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에서 공연된 모차르트 오페라《돈 조반니》의 한 장 면. 돈 조반니역의 토마스 햄슨(오른쪽)과 레포렐로 역의 일데브란도 다르칸젤로. /유니버설 뮤직 코리아 제공
모차르트의 오페라 《돈 조반니》 2막 후반에는 만찬 장면이 나옵니다. 돈 조반니의 칼에 찔려 세상을 떠났던 기사장이 유령이 되어 찾아오겠다고 하는데도, 돈 조반니는 천연덕스럽게 식사만 즐기고 있습니다. 이때 주인의 식욕을 돋우기 위한 악사들의 연주에서 친숙한 멜로디 한가락이 흘러나옵니다.

바로 모차르트 자신의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 가운데 아리아 〈더 이상 날지 못하리〉입니다. 하인 레포렐로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어디서 많이 듣던 곡인걸"이라고 능청스럽게 말합니다.

지옥 불에 빠지기 전의 팽팽한 긴장감을 앞두고, 작곡가 모차르트는 자신의 멜로디를 눙치듯 패러디하며 객석에 웃음을 불어넣는 것입니다.

영화 〈싸움의 기술〉처럼 주먹만 움켜쥐지 않았을 뿐, 관객에게 감동을 전달하려는 '작곡의 기술' 역시 치열하고 복잡하긴 마찬가지입니다.

패러디만이 아니라 일종의 '예고편' 기법도 있습니다. 말러의 교향곡 4번은 특유의 웅장함이나 신비함 없이 소박하면서도 정겹게 출발합니다. 1악장의 주제가 등장하고 한창 발전을 거쳐 말미로 접어들 즈음, 갑자기 다음 교향곡인 5번의 1악장 팡파르가 트럼펫으로 잠깐 등장합니다. 말러는 "질서정연했던 군대가 혼란에 빠질 때, 사령관이 나팔 신호를 통해 질서 있게 깃발 근처로 불러 모은다"고 해설합니다. 교향곡 4번은 1901년, 5번은 1904년에 각각 초연됐으니 발표 순으로는 분명 4번이 앞섭니다. 하지만 작곡 구상 기간은 겹치기에 작곡가 스스로 자신의 테마를 알뜰살뜰 재활용한 것으로 추정하기도 합니다.

한없이 길고 웅장한 브루크너의 교향곡에도 재활용은 있습니다. 브루크너의 작품 중에서도 가장 내면적으로 깊이 있는 악장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교향곡 8번 3악장의 중간 부문에 바로 직전 교향곡인 7번 1악장의 도입부가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지요. 브루크너는 너무나 바그너를 존경했던 나머지, 바그너의 그림자가 여러 교향곡에 깊이 배어 있기도 합니다.

헨델이나 로시니는 아예 대놓고 예전에 썼던 서곡이나 아리아를 자신의 다음 작품에 다시 써먹기도 했던 '자기 복제'의 대가(大家)들입니다. 이런 정황 때문에 이들의 곡을 다소 낮춰 보기도 하지요. 하지만 두 작곡가에게 작품이란 철학적·예술적 신념을 쏟아내는 장이라기보다는, 공연장이나 연주자의 요청에 따라 그때그때 즉시즉시 배달해야 하는 '주문 생산' 같은 것이었습니다. '음악의 주방장들'이었던 셈이지요.

모든 예술가들은 이전의 예술 양식에서 탈피하면서, 동시에 당대 사회와의 긴장감 또한 놓치지 않아야 합니다. 이런 과제들 앞에서 작곡가들이 악보를 펴놓고 골머리를 앓으며 갖가지 기법을 연구했을 것이라고 생각하면 때로는 웃음도, 때로는 고마움도 생겨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