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08.11.29 03:00 | 수정 : 2008.11.30 10:01
보약까지 지어 주며 "소리의 대 이어라"
스승 유언이 내겐 평생의 짐
<이 기사는 weekly chosun 2033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지난 11월 24일 국악인 안숙선씨는 한복을 곱게 차려 입고 본사 주필 서재로 들어왔다. 환갑을 앞둔 나이라는 게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고왔다. 안 명창은 그저 곱기만 한 게 아니라 판소리와 가야금으로 다져진 ‘국악계 프리마돈나’다운 내공도 함께 뿜어냈다. 공연 전에는 목소리를 아끼기 위해 사랑하는 외손자와의 대화마저도 자제한다는 안씨가 2시간이 넘도록 그 귀한 목소리를 가지고 성심 성의껏 인터뷰에 임했다.

강천석/ 요즘 국악을 국내외에 알리느라 바쁘시죠? 지난주에도 일본에 다녀오셨다면서요.
안숙선/ 일본 후쿠오카에 다녀왔습니다. 큰 공연은 아니었지만 의미 있는 공연이었어요. 1500만원 정도의 문예진흥기금을 지원 받아 아기자기한 창극을 만들었거든요. 요즘 웬만한 뮤지컬은 제작비가 수십억원대를 오르내리지만 적은 제작비로 만든 소규모 작품이라 지방은 물론 해외에서까지 공연하기 좋은 작품입니다. 그동안 창극의 정체성에 대해 고민을 많이 했거든요. 창극 역사도 150년을 헤아리는 만큼 이제 기반을 다져야 할 때라서요.
강천석/ 안 선생을 키우셨던 김소희·박귀희 선생 모두가 국악을 알리기 위해 힘쓰셨던 분들이기에 어깨가 더욱 무거울 것 같습니다.
안숙선/ 국악계가 정말로 어려웠을 때 국악을 보존하고 저변을 확대하는 데 온몸을 던졌던 선생님들이십니다. 그분들을 만난 것이 분에 넘치는 복(福)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너무 힘들 때는 ‘참 부담스럽다’고 느끼기도 하죠.
강천석/ 대(代)를 잇는다는 것의 의미는 혈연적인 것뿐만 아니라 예술적인 것도 있잖아요. 김소희 선생께서는 “소리의 대를 이어다오” 하시면서 보약까지 지어 먹이셨다고 들었습니다. 김소희 선생은 어떤 분이셨나요.

안숙선/ 김소희 선생님은 제가 몸이 약하다며 동대문시장에서 장어를 사다 고아 주셨고, 직접 시어머니를 찾아 뵙고 “숙선이는 소리를 계속해야 합니다”라고 말씀해 주신 분이에요. 김소희 선생님은 스승으로서 제가 너무나도 사랑했던 분이죠. 선생님의 모든 것이 존경스러워 소리뿐만 아니라 모든 면을 닮기 위해 노력했어요.
선생님은 화날 때나 기쁠 때나 감정의 큰 기복 없이 여유롭게 행동하셨어요. 한국 사람들의 삶, 정신, 끈기가 담겨 있는 판소리의 대가 끊어지면 어떻게 하나 자나깨나 걱정하시면서 당신의 평생 모은 재산까지 제자양성을 위해 던지셨죠. 선생님은 “우리 소리는 억지를 부리지 말고 순리대로 해야 한다”면서 항상 절제된 소리를 내라고 말씀하셨어요. 슬프다고 슬픈 것을 모두 다 드러내는 것은 품격이 없다면서 말이에요. 무대 위에서 관객을 울리고 웃기는 것도 판소리 사설 본연의 것을 이용해야지 대중 인기에 영합해 엉뚱한 내용을 만드는 걸 용납하지 않으셨어요.
강천석/ 안 선생이 제자들한테 하는 말은 이전에 김소희 선생이 안 선생에게 했던 말과 비슷한 면이 많더군요. 예를 들면 안 선생도 “소리를 쫙쫙 펴서 내라” “기교를 부리기보다는 빨래를 널듯이 툭툭 던지는 소리를 하라”고 하시잖아요. 김소희 선생도 “때까치마냥 입만 딸싹딸싹 부르지 말고 기를 모아 소리를 하라”고 하셨죠.
안숙선/ 어릴 때부터 잘한다는 칭찬을 들었고 자신만만해져 점점 기교적이 되어갔죠. 그런 제 소리가 예술적이라고 생각했어요. 어느 날 선생님께서 직접 북을 쳐주시다가 ‘나이 들면 소리를 끄적거리지 말고 쭉쭉 펴고 싶어진다’고 말씀하시더라고요. 크고 넓으면서도 깊게 던져서 원초적인 소리를 내야지 얼굴에 분칠하듯 소리에 치장을 하지 말라는 거예요. 요즘 저도 그런 소리가 더 좋아요.
강천석/ 김소희 선생이 돌아가시기 전에 안 선생에게 쪽지를 남기셨다면서요. 어떤 내용이었나요.
안숙선/ ‘아무리 많은 사람이 너의 소리를 인정하더라도 단 한 사람이라도 아니라면 그건 아닌 것이다’라는 내용이었어요. 당시 선생님께서 제일병원에 입원 중이셨고 저는 그때 남산에 있던 서울예전에서 강의를 마치고 선생님을 뵈러 갔는데 “집에 가서 읽어봐라”면서 주시더라고요. KBS국악관현악단과 협연한 걸 기억하셨던 모양입니다. 고수와 소리를 맞출 때는 박자에 자유로운 편이었는데, 관현악과 소리를 맞추려다 보니 무척 예민해져 있었어요. 그래서 막판에 지휘자와 재담을 했거든요. 선생님께서 보시기에 그건 아니었던 거죠. 그런 재담을 한 것은 관객을 우습게 본 것이라고 생각하신 겁니다. 그 쪽지를 받은 후 보름도 안 돼 선생님께서 돌아가셨어요.
강천석/ 김소희 선생 제자로 있으면서 가야금 병창 명인인 박귀희 선생을 찾아가셨다면서요. 두 선생님을 동시에 모신다는 것이 쉽지 않았을 텐데, 어떻게 해서 박귀희 선생을 찾아가게 된 건가요.
안숙선/ 남원에서 서울로 올라와 생계를 위해 워커힐호텔 공연단에 들어갔고, 매일 하루 두 번씩 공연을 했어요. 1년 중 쉬는 날이라고는 구정 하루뿐이었죠. 그래도 그때는 무대 위에서 국악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워낙 드물었기에 열심히 했어요. 그렇게 10년 넘게 공연을 하다 보니 기관지가 너무 안 좋아졌어요. 의사가 “쉬지 않으면 위험합니다”라며 휴식을 권하더라고요.
그래서 할 수 없이 김소희 선생님께 말씀 드리고 소리공부를 잠시 중지했죠. 그래도 국악 공부를 멈출 순 없으니 선생님께서 가야금 병창을 배우라고 하셨어요. 그래서 박귀희 선생님을 찾아갔죠. 처음엔 박 선생님께서 일본 공연 때문에 집을 비우셔서 조교에게 먼저 배웠어요. 완창을 해야 하는 판소리와는 달리 가야금 병창은 대목대목 끊어서 배우니까 진도가 빨리 나갔어요.
박귀희 선생님께서 일본에서 돌아오셔서 제 연주를 들으시고는 마음에 드셨나 봐요. 그 다음부터 항상 제 손을 잡고 다니셨어요. 당시 제자들 사이에서는 “숙선이 왔다. 겸상 차려라”라는 말이 유행어가 될 만큼 사랑 받는 제자가 됐어요. 당시 선생님은 중요무형문화재 보유자셨고 전수생이 두 명이었어요. 그중 하나가 저였죠. 선생님 타계 후에는 제가 중요무형문화재 보유자가 됐습니다.
강천석/ 안 선생 프로필을 보면 가야금 병창 명인으로 나오는데 실제로는 판소리 명창으로 불리시지 않습니까. 언제부터 판소리 공부에 정성을 쏟으신 건가요.
안숙선/ 국립창극단에 들어가면서부터입니다. 1년 정도 가야금 병창을 배운 후 병원에 다시 갔더니 이제 소리를 해도 된다고 했어요. 1979년 당시 박귀희 선생님께서 국립창극단 단장으로 계셨는데 제더러 창극단에 들어오라고 하셨어요. 오디션을 보고 들어갔죠. 그 곳에서 제가 이전까지 소리를 하기에 힘들다고 느꼈던 여건이 어느 정도 풀렸어요. 순수하게 음악에 전념할 수 있는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죠. 소리를 배우면 배울수록 그동안 제가 생각하던 소리 세계와 다른 세계가 보이더라고요. 수많은 대가 선생님들을 만나면서 여러 선생님들께서 가지고 계신 소리의 세계와 생각을 전수 받을 수 있었어요. 정광수, 박봉술, 성우향 명창 등이 모두 그때 만난 선생님들이에요.
강천석/ 안 선생은 정말로 대단한 스승들을 독점한 것 같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그중 한 사람의 제자가 되기도 힘들 텐데 말입니다.
안숙선/ 선생님들께서는 “지금까지 여성 소리만 했는데 남성 소리도 하면서 다양한 소리를 해보라”고들 하시더라고요. 당시 허규 극장장님께서 단원들을 위해 각 분야의 ‘인간문화재’ 선생님들을 모셔와 다양한 교육을 시켰어요. 제가 공부 욕심이 많았거든요. 그래서 따로 개인 레슨을 받기 시작했어요. 박봉술 선생님은 직접 저희 집에 오셔서 레슨해주시고 조용히 가시곤 했어요.
강천석/지금까지 많은 선생님들에게 배웠는데요. 선생님들의 소리마다 ‘이러한 특색이 있다’라고 말해 주실 수 있나요.
안숙선/ 여러 선생님들께 소리를 배웠지만 한 분 한 분 선생님 소리의 독창성과 관련해서는 행여 잘못된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닐까 말을 조심해 왔어요. 그렇지만 이 자리에서 굳이 이야기를 하자면, 김소희 선생님은 가장 절제된 소리를 하셨어요. “감정을 너무 사실적으로 드러내는 것은 문제가 있는 거다”라며 절제를 통해 소리의 제 맛을 풀어내시려고 노력하셨죠. 발음·음정·박자 모두 기막히게 정확하셨어요. “소리하는 사람도 공인”이라며 예술가로서의 예절과 기본자세도 강조하셨고요.
강도근 선생님은 자전거를 타고 다니셨고 직접 농사를 지으셨어요. 너무나 순수하고 소박한 분이셨죠. 송만갑·김정문으로 이어져 내려오는 동편제를 이으셨던 분이에요. 원리원칙대로 기교 없이 통성으로 소리를 하셨죠.
박봉술 선생님은 김소희 선생님께서 “박봉술이야말로 진정한 광대”라고 말씀하실 정도로 관객의 감정을 쥐락펴락하실 수 있는 분이셨어요. 목이 꺾여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을 때에도 소리를 하셨고, 음정과 박자를 잘 살리셨고 재담에도 천재였습니다.
정광수 선생님은 등장인물에 맞게 소리의 구성이 잘 짜여 있어 관객들이 그 인물을 극중의 성격대로 느낄 수 있도록 표현을 실감나게 해줘야 한다고 강조하셨어요. 내부로부터 기가 모아져 나오는 소리를 중시하셨지요.
정권진 선생님께는 많이 배우지 못했어요. 박귀희 선생님 소개로 정권진 선생님께 심청가를 배우기 시작했는데 도중에 타계하셨고, 이후 같은 계파인 성우향 선생님께 이어서 다 배웠죠.

강천석/안 선생은 각 명창들의 소리를 잘 소화해 새로운 소리를 만들었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안숙선/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단지 많은 선생님들께 배우면서 제 단점들을 보완했고 저도 모르는 사이에 그분들의 정서가 들어와서 더 웅장하고 깊이 있는 소리가 될 수는 있었겠지요. 그렇지만 선생님들의 소리를 제 나름대로 소화했다고는 말할 수 없을 것 같아요. 각 선생님들의 특성을 제 나름대로 바꿀 수 있는 그릇이 아직은 되지 않았거든요.
강천석/ 안 선생에게 처음으로 소리를 가르친 분은 주광덕 선생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한 1년 배우다 그분이 돌아가셨을 때 철도 제대로 안 난 어린애가 너무 서럽게 슬피 울어 주위 사람들이 모두 놀랐다고 하더군요. 처음 만남은 어떻게 이뤄진 건가요.
안숙선/ 여덟 살 때 이모님께서 소개시켜 주셨어요. 큰절을 올린 후 심청가 한 소절을 했는데 잠깐 들으시더니 ‘그만하면 쓰겄다’해서 배우게 됐죠.
강천석/안 선생 외가 쪽에 국악계 유명인사들이 많으시더라고요. 국악 가계도를 좀 알려 주시겠어요.
안숙선/ 먼저 어머니의 외사촌 되시는 강백천 선생님이 대금산조 중요문화재입니다. 또 다른 외사촌 강도근 선생님은 판소리 동편제 ‘인간문화재’고요. 강순영 이모님은 가야금을 하셨습니다. 외삼촌도 가야금과 소리를 하셨는데 일찍 돌아가셨고, 외삼촌의 아들인 강정렬씨가 가야금 ‘인간문화재’입니다. 제 여동생 안옥선은 판소리와 가야금병창을 하는데, 지금 중앙대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제 딸은 국립창극단에서 거문고 연주를 하고요.
강천석/ 예전에는 명창이라고 하면 전부 남자였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남자 명창 찾기가 힘들어요.
안숙선/ 정말 남자 소리꾼이 별로 없어요. 그래서 제가 심사위원으로 대회에 나가면 실력이 조금 모자라도 “남자부터 뽑읍시다”라고 말할 정도예요. 그만큼 여성 소리꾼의 실력이 나아지고 많아졌죠. 문헌상 최초의 여성 소리꾼은 신재효 선생 시절 대원군의 사랑을 받았다는 진채선 명창입니다.
강천석/ 판소리는 말이 통하지 않는 외국에서도 호평을 받는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어요. 예술은 언어를 넘어서 호소하는 무언가가 있는 것 같아요. 서양의 오페라가 한국에서도 호평을 받는 걸 보면 말입니다.
안숙선/ 오페라나 서양의 성악은 모두 예술성과 스타일을 가지고 사랑을 받고 있죠. 발성은 이렇게 해야 하고 다른 것은 이렇게 해야 한다는 규정된 양식이 있어요. 하지만 우리 소리는 우리가 말하고 싶어하는 희로애락의 모든 감정을 소리꾼이 자신의 기량과 인생 체험에 녹여 소화시켜 하는 것이기에 마음 깊숙이 와 닿는 겁니다.
강천석/ 예술은 새로운 것들이 만들어지면서 더욱 발전한다고 하는데요. 판소리도 이전에 알려진 다섯 바탕 이외에 창작곡들이 많이 있나요.
안숙선/ 많이 있죠. 특히 의사나 열사를 소재로 한 소리가 많아요. 이런 소리는 역사적인 인물을 의도적으로 강조한 것이라 예술성은 부족해요.
강천석/ 국내에는 판소리전용극장도 거의 없는 것 같아요. 남산 한옥마을에 하나 있는 게 전부라고 들었어요. 학생들도 어려서부터 우리 음악보다는 서양음계이름부터 배우는 게 현실이고요.
안숙선/ 사실 지금이야말로 우리나라를 대표할 수 있는 전통예술 교육이 더욱 필요한 시대라고 생각해요. 스페인에 여행가면 제대로 된 플라멩코 한번 보러 가자고들 하잖아요. 한국에 오면 제대로 된 국악 한번 들으러 가자고 할 거잖아요. 우리 것, 우리 문화재는 우리가 쭉 이어가야 할 것들이에요. 그런데 전통 악기 하나 제대로 배우는 학생이 없어요. 물론 장시간 지속되는 판소리 한바탕을 모두 듣고 이해하는 것은 무리지만 말입니다. 전통이 훼손돼 없어질까봐 보존에만 전전긍긍하는 데도 문제가 있어요. 때문에 이제는 ‘어떻게 국악을 대중적으로 만들까?’를 고민해봐야 할 것 같아요. 완창은 오랜 시간이 걸리지만 5분 안에 끝나는 한 대목을 익혀 생활 속에서 늘 국악과 가까이 지낼 수도 있는 거죠.
강천석/ 이전보다도 ‘소리 매니아’들이 줄어들고 있다는 안타까운 이야기가 있더라고요.
안숙선/ 소리를 조용히 들으시면서 끝나고 나면 가만히 조언해 주시던 ‘귀명창’들이 많이 사라졌어요. 소리는 들어주는 대상이 있어야 할 수 있는 거잖아요. 이전에는 한복 색깔, 비녀 길이 등과 같은 무대 의상부터 소리에 이르기까지 일일이 체크하고 조언하면서 후원까지 해주셨던 분들이 많았어요. 소장하고 있는 병풍을 판소리 완창 무대에 걸어주겠다며 연락하셨던 분들까지 계셨죠.
강천석/참선하는 스님들은 목숨이 끊어지는 순간까지 참선을 하는 꿈을 꾼다고 합니다. 소리꾼의 꿈도 그런가요. 목숨이 끊어지는 순간까지 소리를 하고 싶나요.
안숙선/ 그렇죠. 이 나이에 제가 다른 곳에 목숨 걸 곳도 없고요.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소리밖에 없어요. 하지만 소리는 끝이 없죠. 하면서 ‘된다’ 싶으면 뭔가 허전하고 새로운 것이 보이거든요. 또 듣는 분들은 연습을 안하고 나가면 금방 알아채요. 귀명창이 아닌 초보자까지도 이상하다는 표정을 짓거든요. 소리를 제대로만 하면 관객의 생각이 다른 곳으로 흘러가 헤매는 일은 절대 없지요.
- C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