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 최고의 연극'은 쓰레기 더미와 곱창집에서 나왔다

  • 박돈규 기자

입력 : 2008.11.27 05:59

평론가 10명이 뽑은 올해의 작품
더러움 속에 피어난 고결함 '원전유서' 7표
곱창집의 구불구불한 사연 '야끼니꾸 드래곤' 5표

한 해 연극을 100편 넘게 보는 연극평론가 10명에게 물었다. "올해의 연극 베스트 3를 꼽는다면 무엇이냐"고. 또 "올해 최고의 배우는 누구냐"고.

2008년 그들을 가장 크게 흔든 연극은 연희단거리패의 4시간30분짜리 문제작 《원전유서》(原典遺書)였다. 설문에 답한 10명 중 7명이 《원전유서》를 베스트 3에 올려놓았다. 예술의전당과 일본 신국립극장이 합작한 연극 《야끼니꾸 드래곤》은 5명의 지지를 받았다.

호연(好演) 없는 수작(秀作)은 없다. 2008년 무대를 빛낸 배우도 《원전유서》와 《야끼니꾸 드래곤》에서 나왔다. 평론가 10명 중 5명이 《원전유서》에서 김소희(어진네)의 연기를 최고로 뽑았다. 《야끼니꾸 드래곤》의 고수희(영순)는 2표를 받았다. 공교롭게도 둘 다 극중 배역은 어머니였다.
《원전유서》의 어진네(김소희·사진 위)는 남편의 폭력으로 생긴 상처를 흙으로 문지른다. 고수희(아래 사진 왼쪽 끝)는 한일 합작 연극《야끼니꾸 드래곤》으로 일본에서 요미우리연극상 연기상 후보에 올랐다. /연희단거리패·예술의전당 제공
《원전유서》는 거대한 쓰레기 더미에 사는 사람들을 그렸다. 남자들의 대사는 관념적이고 여자들은 구체적이다. "더 압축할 수 있지 않았느냐"는 견해도 있지만 휴식시간에 '이탈'한 관객은 소수였다. 긴 시간을 견디는 밀도와 연극성을 입증한 셈이다. "젊은 작가(김지훈)의 관념에 머물지 않는 절절함" "공연이 불가능할 것 같은 언어를 무대에 현실감 있게 발붙인 연출력" 같은 평을 받았다. 김소희는 "인물을 강력하게 자기화하며 관객을 압도하는" 배우였다.

40년 전 오사카에서 곱창집을 운영하는 재일교포 가족을 들여다보는 《야끼니꾸 드래곤》에는 가슴을 쿵 울리는 인생이 있었다. 사실적인 드라마가 연극적인 형식으로 펼쳐지는데, 그 사이로 감정의 격랑이 소용돌이쳤다. 평론가들은 "코미디적인 삶의 활력과 페이소스를 그려 사유와 감동을 함께 안겼다" "재일교포에 대한 깊은 성찰, 한일 양국의 문화소통을 보여줬다"고 했다. 고수희는 "약하지만 강하고 웃지만 울고 있는 우리 어머니의 모습을 탁월하게 표현했다"는 평이다.

올해의 연극 베스트 3에서는 "시적 대사와 신체극적 요소를 끈끈하게 결합한" 김낙형 연출의 《맥베드》가 3표를 얻었다. 실험극장의 《고곤의 선물》, 차범석희곡상 당선작 《침향》, 미추의 《은세계》, 부투소프 연출의 《갈매기》가 2표씩을 받았다. 올해의 배우로는 《고곤의 선물》의 정동환과 서이숙, 국립극단 《테러리스트 햄릿》의 햄릿 서상원, 《침향》에서 희극적 이완을 가능하게 한 이지하, 《안티고네》의 정대철도 거론됐다.


아들의 마지막 말 "엄마, 몸이 딱딱해져. 잠 와"

#1. 《원전유서》의 명장면

뭇매를 맞은 어동이(윤금정)는 편지쓰기 숙제를 마치고 기진해 쓰러진다. "엄마, 몸이 딱딱해져. 잠 와"가 그의 마지막 대사다. 엄마 어진네(김소희)는 웃옷을 벗어 죽은 아들을 덮어준다. 어동이 편지를 누군가 읽는다. "기역 니은 디귿 리을 미음 비읍…." 이 딱딱한 자음들이 노래가 되고 주문(呪文)이 된다. 어진네 텃밭에서 상추가, 쓰레기산에서는 소나무 한 그루가 올라온다. 어둠을 밀어내는 푸른빛이었다.

#2. 《야끼니꾸 드래곤》의 명장면

무대에 벚꽃이 진다. 강제 퇴거당한 가족이 뿔뿔이 흩어지는 순간, 벚꽃은 기세 좋게 날린다. 용길(신철진)은 리어카에 아내 영순(고수희)을 태우고 힘차게 골목길을 오른다. 집단 따돌림을 견디다 못해 자살한 아들 도키오가 지붕 위에서 팔을 흔들며 배웅한다. 눈사태처럼 벚꽃이 쏟아진다. 감정의 둑이 터지며 눈물을 흘린 관객이 많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