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식ABC] 사후(死後)에 더 각광받는 멀티플레이어 번스타인

  • 김성현 기자

입력 : 2008.11.24 03:04

1987년 7월 미국의 탱글우드 페스티벌. 학생 오케스트라와 한창 리허설 중이던 당시 69세의 노(老) 지휘자가 휴식시간에 이렇게 한탄했습니다.

"작곡가들은 나를 진정한 작곡가로 여기지 않고, 지휘자들은 진짜 지휘자로 생각하질 않아. 게다가 피아니스트들은 나를 피아니스트로 인정하질 않는다고."

업종 분화와 전문화가 미덕으로 정착한 클래식 음악계에서 '만능 음악가'로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힘든가를 토로한 것으로 보입니다. 올해 탄생 90년을 맞은 레너드 번스타인(Bernstein·1918~1990·사진)입니다.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 같은 인기 뮤지컬 작곡가이면서 동시에 교향곡과 미사곡 등 진지한 클래식 음악을 여럿 남겼고, 뉴욕필하모닉을 이끌던 명 지휘자이면서 피아니스트이기도 했던 이 다재다능한 음악인을 한마디로 정의하기란 참으로 난감한 노릇입니다. 1958년부터 1972년까지 14년간 뉴욕 필에서 〈청소년음악회〉를 50여차례 직접 진행하기도 했으니 유명 방송인이라고도 불러야겠네요.

이 '멀티플레이어(multiplayer)'에게 단 한명의 숙적이자 라이벌이 있었다면 역시 올해 탄생 100년을 맞은 지휘자 카라얀(Karajan)입니다. 번스타인이 신대륙 미국을 상징한다면 카라얀은 본토 유럽을 대표했고, 번스타인이 세계 2차대전 이후 말러의 교향곡을 리바이벌하는 데 공헌했다면 카라얀은 베토벤·브람스·브루크너로 이어지는 독일 교향악의 전통에 평생 매진했지요. "카라얀이 음악을 만드는 장인(匠人)이었다면 번스타인은 그 자신이 음악이었다"는 말처럼 음악관부터 지휘 스타일까지 모든 것이 대조적이었습니다.

카라얀과의 차이를 묻는 질문에 언젠가 번스타인은 "내가 10년 더 젊고, 5㎝ 더 크다는 것"이라고 위트 있게 받아넘겼지요. 1989년 카라얀 타계 소식이 전해지자 번스타인은 파리에서 콘서트를 잠시 멈추고 프랑스어로 청중을 향해 "동료이자 위대한 지휘자인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을 추모하며"라고 말한 뒤 묵념을 제안하기도 했습니다.

미국보다는 유럽을 우위에 놓는 클래식 음악계의 관습상 지휘자로서 번스타인은 아무래도 카라얀의 광채에 밀렸던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번스타인의 영향력 아래 성장한 지휘자 마이클 틸슨 토머스(샌프란시스코 심포니)와 켄트 나가노(독일 바이에른 국립오페라극장), 젊을 적부터 번스타인의 곡을 즐겨 연주한 사이먼 래틀(베를린 필) 등이 잇따라 등장하면서 21세기 들어 작곡가로 재조명받고 있습니다. 올해 번스타인의 탄생 90주년을 맞아 '친정' 뉴욕 필에서는 기념 콘서트를 열고 있고 리허설과 연주 영상도 쏟아지고 있습니다.

자신은 제대로 발붙일 분야가 없다고 한탄했지만 숨진 뒤에도 여전히 다각도에서 부각되고 있는 셈이지요. '20세기 음악계의 레오나르도 다빈치'라는 별명이 무색하지 않았던 음악가, 바로 번스타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