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상트페테르부르크 필 내한공연, 소박하고도 따뜻한 '비창'

  • 김성현 기자

입력 : 2008.11.15 03:12

12~13일 이틀간 내한 공연을 가진 러시아의 상트 페테르 부르크 필하모닉과 지휘자 유리 테미르카노프(오른쪽). /예술의전당 제공
잠시 기도하듯 눈을 감고 두 손을 모으던 70세의 노(老) 지휘자가 천천히 손을 내리자, 더블 베이스와 바순이 음울하고 고통스러운 저음을 내뱉기 시작했다. 13일 예술의전당에서 열린 상트 페테르부르크 필하모닉(지휘 유리 테미르카노프)이 연주한 차이코프스키 교향곡 6번 〈비창〉의 시작이었다.

차이코프스키가 세상을 떠나기 엿새 전, 이 작품을 작곡가 자신의 지휘로 초연한 악단이 바로 이 오케스트라다. 음악에도 모국어(母國語)가 존재할까. 런던 필하모닉과 BBC 필하모닉부터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까지 올해 내한 공연에서 유난히 사랑받았던 곡이 〈비창〉이기에, 러시아 본산에 대한 기대도 그만큼 클 수밖에 없었다.

팽팽하게 긴장을 쥐고 가다 끝에서 놓아버리는 지휘자 크리스토프 에센바흐(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의 치밀함, 혈기왕성한 지휘자 자난드레아 노세다(BBC 필하모닉)가 보여준 활력은 찾기 힘들었다. 그 자리를 대신한 것은 자연스럽기 그지없는 소박함과 따뜻함이었다.

투박하고 단단한 금관을 앞세워 거침없이 본론으로 들어가는 1악장의 힘은 여전히 묵직했고, 2악장에서 우아한 선율에 리듬을 부여하는 방식도 남달랐다. 서구 악단이 자랑하는 목관의 윤기(潤氣)나 꼼꼼하고 치밀한 앙상블이 때로는 아쉬웠지만, 슬픔을 표현하는 방식도 다양한 법이다. 호쾌한 3악장이 끝날 무렵이 아니라, 2악장부터 서둘러 박수가 터져 나온 점도 특이했다.

'철의 장막'으로 동구권이 가려 있던 냉전 시기, 소련의 악단은 신비와 경계의 대상이었다. 이 오케스트라의 옛 명칭인 레닌그라드 필하모닉은 '강철 군단'의 상징이었고, 무려 반세기 간 이 악단을 통치했던 지휘자 므라빈스키는 철통 같은 앙상블을 이끌던 '전제 군주'의 대명사였다.

하지만 소련이 무너지고 '국경 없는 세계화'의 바람이 불면서 뚜렷하기만 하던 오케스트라 사이의 음색 차이도 엷어지고 또 옅어만 가고 있다. 목관과 금관을 좌우로 나란히 배치하거나, 바이올린을 무대 양편으로 갈라놓은 뒤 더블 베이스를 제1바이올린 뒤편에 놓고 첼로를 동심원상 그 앞자리에 포진시키는 고유의 악기 배치는 그대로였다. 하지만 므라빈스키 시절을 강렬하게 반추하는 오랜 음악 팬에게는 다소 아쉬움이 남을 만큼, '강철 군단'의 모습은 악기 배치 같은 흔적으로만 전해지고 있었다.

전체적으로 해답보다는 질문을 던지는 연주회에 가까웠다. 지휘자는 앙코르로 들려준 엘가의 〈수수께끼 변주곡〉 가운데 '님로드'에서 섬세하고 촘촘한 현악으로 그 대답을 대신했다. 차가운 장중함에서 따뜻한 인간미로 이동 중이라는 걸 넌지시 일러주듯이 말이다. 차이코프스키의 작품만을 연주했던 이틀간의 '러시아 음악 여행' 가운데 유일한 비(非)러시아 곡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