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국이 손짓해도 폐허가 기다려도…

  • 박돈규 기자

입력 : 2008.11.13 03:23

예술의전당에 올려진 지난 20년간 최고작 연극 '갈매기' 재공연
사랑이 남긴 처참한 잔해에 대하여…

배우로도 실패하고 사생활도 망가져 돌아온 니나(왼쪽₩정수영)가 작가로 성공한 트레플레프(김 태우)를 품에 안고 있다. 트레플레프는 다음 장면에서 권총 자살한다. /예술의전당 제공
무대는 폐허다. 벽은 상처투성이이고 벽지도 크레용으로 마구 직선을 그어댄 듯한 무늬다. 그 수직의 10m 벽 위에 수십 마리 갈매기들이 앉아 있다. 어쩌면 벽의 상처들은 그들이 부리로 쪼아댄 흔적 같다. 사람이 여럿 드나들 수 있을 만큼 거대한 창문(가로 3.7m, 세로 8.8m)은 이미 깨진 상태다.

연극 《갈매기》는 이 폐허를 레일 삼아 달린다. 인물들 사이의 관계는 시작부터 덜컹거린다. 마샤(김소희)는 자신을 짝사랑하는 메드베젠코(김경익)가 "왜 항상 검은 옷을 입느냐"고 묻자 "내 인생의 상복(喪服)"이라고 대꾸한다. 마샤의 마음은 트레플레프(김태우)에게 가 있고, 트레플레프는 배우를 꿈꾸는 니나(정수영)와 연인이다.

그러나 이것이 끝이 아니다. 니나는 트레플레프의 엄마 아르카지나(정재은)가 데려온 유명 작가 트리고린(장우진)에게 마음이 끌린다. 사랑을 잃고 트레플레프는 휘청거린다. 물을 떠난 갈매기처럼 결핍(불완전)에 시달린다. "결혼과 작가, 두 가지가 꿈이었는데 다 실패했다"(소린)는 탄식, "인생을 바꾸기엔 너무 늦었다"(도른)는 자포자기도 등장한다.

《갈매기》는 예술의전당이 개관 20주년을 맞아 연극 전문가와 관객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 최고의 연극으로 뽑혀 리바이벌됐다. 그러나 이번 무대는 연출가도 배우도 바뀌어 2004년 평단과 대중의 지지를 받았던 《갈매기》와는 완전히 다른 작품이 됐다. 황금마스크상을 받은 러시아의 정상급 연출가 유리 부투소프(Butusov)는 "파국 이후의 세계를 콘셉트로 잡았다"고 밝혔었다. 계속 출렁이는 시간, 그 재앙을 담겠다는 의지였다.

지난 11일 본 《갈매기》는 가벼운 소극장 연극들과는 다른 사이즈와 실험정신을 갖추고 있었다. 하지만 다소 정교하지 못했다. 세트는 그 안에 묶여 있는 인물들의 상처를 비추고 있었지만 그 자체로 연기에 개입하거나 무대를 장악하지는 못했다. 의자들을 쓰러뜨리고, 물을 끼얹고, 목을 조르는 등 거친 에너지를 실은 장면들도 그 행동이 수긍될 만한 감정이 만들어지지 않은 상태라 객석의 공감은 약했다. 체호프(Chek hov) 희곡을 가볍게 풀었다는 것, 청각적 효과가 두드러진다는 게 특징이다.

2막 끝에서 니나가 부른 헨델의 오페라 《리날도》 중 아리아 〈울게 하소서〉는 귓바퀴에 오래 맴돌았다. "울게 하소서, 슬픈 운명에/ 나 한숨 짓네, 자유 위해…." 마샤가 울면서 한 희극 연기와도 통했다. 극의 끄트머리에서 인생은 음악이 됐다. 트레플레프가 치는 타자 소리와 피아노 연주가 겹쳐졌고, 죽은 아들을 껴안은 아르카지나의 울음이 뒤섞이며 막이 내렸다. ▶23일까지 예술의전당 토월극장. (02)580-13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