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08.11.06 09:21
연극 '민들레 바람되어'의 배우 이지하
해가 짧아지고 바람이 제법 차진 대학로 골목을 걸으며 생각했다. 올 한 해 이 길을 가장 많이 지나다녔을 이가 누구일까. 누가 가장 왕성하게 활동하고, 가장 인상적인 연기를 보여줬을까. 오래 생각할 필요 없이, 두 번 고민할 나위 없이 '이. 지. 하' 라는 세 음절이 튀어나왔다.
자그마한 체구, 자신만의 또랑또랑한 화법, 놀라울 만큼 뻔뻔하다가도 이내 소녀처럼 수줍어하는 야누스의 얼굴. 불혹을 바라보는 나이가 믿기지 않지만 그녀에게 나이를 먹는다는 것 자체는 그다지 겁나는 일이 아니다. 다만 두려운 건 어떤 한 시기에 달성되어야만 할 것이 달성되지 못한 채 그 시기가 지나가 버리고 마는 것. 온 힘을 다해 치열하게 생의 시간을 살아내고 싶은 이지하는 한 해를 마무리할 마지막 작품 '민들레 바람 되어'의 대본을 손에서 뗄 줄 모른다.
도무지 미워할 구석이 없다
배우 오달수는 그녀를 두고 ‘추억을 남길 줄 아는 배우’라고 했다. 함께한 관객들이며 작업자에게 몰입된 인물만이 아니라 최선을 다했던 추억, 연극쟁이의 고집스러움을 남겨준다며. 작가 이해제는 포장지를 뜯어서 이지하라는 내용물이 어떤가하고 들여다볼라치면, 그녀는 어느 순간 이미 포장지 뒷면으로 스스로를 접고 있는 배우라고 했다. 동료들의 증언에 따르면, 이지하가 지나온 자리는 어느 하나 허투로 만들어진 게 없다.
2005년 서울연극제 신인연기상을 안겨준 '그린벤치'의 처절하기 그지없던 요꼬, 올해 초 동아연극상 연기상을 안겨준 '오레스테스'의 증오와 분노로 가득 찬 엘렉트라는 대표적인 예일 뿐이다. 주연 이상의 에너지를 필요로 하는 조연으로도 몸을 사리지 않는 연기로 정평이 난 그녀다.
올해 역시도 불편한 발레 튀튀를 입고 열연한 '왕궁식당의 최후'의 무희, 연변 사투리를 능청맞게 구사하던 '침향'의 영순, 엉뚱하고 고집스러운 말꼬리를 잡기의 여왕 '억울한 여자'의 유코까지 그녀에게는 어느 것 하나 쉬이 넘길만한 캐릭터가 없었다. 모두 다른 개성을 지녔지만 하나같이 관객들의 미움을 살 요소가 다분한 캐릭터들이었다. 이지하는 이 아슬아슬한 줄타기에서 그녀들을 모두 미워할래야 미워할 수 없는 여자로 무대 위에 쏘아 올렸다.
“캐릭터가 가진 위험요소를 극복하려면 인물의 진실성을 놓치면 안 돼요. 연극을 볼 때면 저마다 등장인물에 자신의 인생을 투영하면서 작품을 받아들이잖아요. 5만 원짜리 장뇌삼을 3천 만 원짜리 산삼이라며 사기 치는 영순이의 심정은 어땠을까요. 말도 안 되는 억지를 부리는 결점 투성이 유코도 마찬가지고요. 그렇게 인물의 내면을 들여다보니 영순이의 상황도 한 번에 이해가 되고, 유코의 마음도 한 번에 와 닿더라고요. 결점 있는 인물들이지만, 관객에게만큼은 내침을 당하지 않으려고 발버둥친 셈이죠(웃음). 그런데도 전 이상하게도 자꾸 결점 많은 인물에게 더 애정이 가네요.”
원로 배우들이 대거 참여했던 연극 '침향'에서 자칫 지나치게 무거워질 수 있는 극에 생기를 주고 템포감을 살리는 이지하의 ‘영순’은 단연 돋보였다. 매 작품마다 뿜어져 나오는 그녀의 존재감을 생각해볼 때 데뷔작 '바보각시'(1993)와 '종로고양이'(1997) 이후 지난 9월 아르코예술극장 소극장에서 공연된 '억울한 여자'로 10년 만의 주인공을 맡았다는 것은 의외의 사실이다.
일본 극작가 쓰시다 히데오의 희곡을 원작으로 한 '억울한 여자'는 집단에 안주하려는 일본인의 특성을 풍자적으로 묘사하고 있지만, 소통의 부재라는 현대인의 보편적 문제와도 맞물려 다양한 감상과 여운을 남긴 작품이다. 연습 기간에 비해 공연 기간이 짧아서 많은 아쉬움을 남겼던 이 작품은 다행히도 공연 후 좋은 평가를 받아 곧 재공연 무대를 가질 예정이다.
“연기 변신이요? 배우는 연기를 통해 캐릭터와 관객 사이에 영적인 교감이 이뤄지는 순간에 비로소 변신을 하는 거라고 생각해요. 솔직히 ‘변신’이라는 말을 좋아하지는 않아요. 변신하면 왠지 외향의 변화가 먼저인 듯해서요.”
그녀 앞에 놓인 연극이라는 삶
이지하는 결코 무리한 적이 없다고 했다. 욕심내지 않는 성격은 배우의 성공이라는 측면에서는 2% 부족할지 모르나 지금껏 연극 무대에서 버티게 해준 힘도 거기에 있다. 작품을 고를 때도 찾아 나서기 보다는 자연스럽게 다가온 작품들 가운데서 마음 가는 것을 택하는 편이다.
지초 지(芝)에 여름 하(夏). 여름에 피는 난초라는 뜻의 지극히 여성스러운 이름이다. “문학도였던 아버지가 지어주신 이름인데 어릴 때는 놀림감이었고 간혹 남자 이름으로 오해도 많았어요. 목소리도 하이톤의 칼라가 어릴 때는 싫었어요. 저는 늘 허스키 중저음에 대한 환상을 품고 있거든요. 이런 사소한 콤플렉스부터 소극적인 성격까지 어릴 때는 배우라는 직업을 생각해본 적도 없었어요. 중학교 때 뮤지컬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를 보기 전까지는 말이죠.”
공연 한 편이 인생을 바꾼다는 말이 고스란히 이지하를 저격했다. 수줍음 많던 소녀는 주변의 예상을 뒤엎고 연극영화과에 진학했다. 졸업 후 연희단거리패에서 직업 배우로서의 삶을 시작했지만 가난한 연극배우의 생활에 고단하고 지쳐 잠시 직장 생활을 한 적도 있었다. 그러다 역시 '이건 아니다' 싶은 생각이 들던 차에 극단 백수광부에 합류하며 다시 연극을 시작한 게 이제 10년. 단원들끼리 ‘단어’ 하나를 가지고도 작품을 만들었던 경험을 통해 그녀는 굳은 믿음이 생겼다. 작품을 성공시키는 힘은 대단한 조건이 아니라 함께 하는 이들과의 믿음이라는 것을.
“어릴 때 정말 책벌레였어요. 학창시절에는 무척 조숙한 아이였죠.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기 전에 '좁은 문'과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을 읽다가 아버지가 ‘네 나이에 맞는 독서를 하라’며 책을 다 압수한 적도 있었어요. 그런데도 몰래 다락에 숨어서 '자기 앞의 생'을 읽다가 울곤 했으니 저도 참 별났죠.”
천진한 아이의 시선으로 바라본 어른들의 모습 속에서 삶과 사랑을 이야기하는 에밀 아자르의 '자기 앞의 생'은 그녀에게 읽고 또 읽어도 매번 다른 감동을 주는 특별한 책으로 남아있다. 소극적이고 겁이 많은 소녀였지만, 가슴 속 일렁이는 파도를 무심코 지나치지 않았던 그녀에게 어쩌면 연극은 놓치고 싶지 않은 삶이었을지 모른다.
“저는 굉장히 독립적이고 자신만의 성벽이 견고한 아이였어요. 그게 연극을 하면서 많이 무너졌는데, 연극 덕분에 사람이 된 거죠(웃음). 연극이 세상을 바꿀 수 있을지는 의문이지만 사람을 바꾸는 건 분명해요.”
땅에 붙어있는 배우가 되리라
어린 시절 독서를 통해 쌓인 감성의 자양분이 그녀에게 연극을 할 수 있는 용기를 주었다면, 지금은 사람 관계 속에서 배우는 크고 작은 결을 통해 연기의 지평을 넓혀가는 중이다.
“저는 이상이 높은 배우보다는 실존하는 것에 더 충실한 땅에 발을 붙인 배우가 되고 싶어요. 그래서 혼자보다는 ‘함께’가 더 좋고요. 이제 '민들레 바람 되어'의 오지영이 되어 무덤 속에서 남편을 이해하고 보듬는 일에 전념해야죠. 올해 참여한 네 작품은 모두 처음 만나는 배우, 스태프들과의 작업이었어요. 다양한 선·후배들과 연예인, 무명 배우까지 정말 다양한 이들을 만났어요. 같은 배우인데도 전혀 다른 가치관을 갖고 있다는 사실에 많이 놀라기도 했고요. 그렇게 다양한 배우군 안에서도 너무나 다양한 인생사가 존재 한다는 건 정말 큰 배움이에요.”
이지하는 지금까지 연극배우로 살 수 있는 동력을 ‘사람과 사람이 직접 만나는 생생함’때문이었다고 생각한다. 또한 밝음에서 어두움으로, 어두움에서 밝음으로 적절하게 스스로를 다스릴 줄 아는 능력이 그녀를 자신만의 보폭으로 무대에 서게 해 준 또 하나의 동력이었을 것이다. 그런 이지하에게 의미있는 예쁘고 작은 상이 주어졌다.
‘하얀 손수건 상’, 배우 정규수를 후원하는 소박한 모임에서 매해 가장 칭찬해주고 싶은 연극배우를 한 명 선정하는데, 진심으로 수고를 위로하는 선배와 관개들의 격려상인 셈이다. 비록 번쩍번쩍한 금테 두른 상패는 아니지만 따뜻한 마음이 모이는 상이니 만큼 그녀에게는 뜻 있는 추억이 될 수 있겠다.
“오랫동안 작업을 하다보면 자극이 필요한 순간이 오는데 그때 딱 맞는 조건의 작품이 나타나면 금상첨화겠지요. 정말이지 배우는 어느 정도 운을 타고나야 되는 것 같아요. 연극은 혼자 하는 작업이 아니니까 매번 좋은 사람들을 만나는 것도 ‘자기 복’ 아니겠어요? 배우는 일상의 삶과 함께 가는 직업이잖아요. 살아온 만큼 알고, 느끼는 만큼 나오는 게 연기니까 찾아내고 찾아 가야하는 노력을 게을리 해서는 안 되죠. 예전에는 연기를 통으로 했다면 지금은 작은 순간들에 집중하는 편이에요. 맡은 배역과의 영적인 교류만 찾아지면 연기가 되는 줄 알았던 건 착각이었죠. 거기서 부터가 연기의 시작이란 것을 이제야 알게 된 것 같아요.”
연극 '민들레 바람 되어'
일시 11월 7일 ~ 2009년 1월 11일 평일 8시 / 토·일 3시 7시
장소 동숭아트센터 소극장
문의 02-766-6007
- C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