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여년 무대 지킨 두 배우의 쓸쓸한 퇴장

  • 박돈규 기자

입력 : 2008.10.30 03:25

'정년제'로 국립극단 떠나는 80대 원로배우 백성희·장민호씨

백성희씨(왼쪽), 장민호씨.

"두 분께는 죄송하지만 60세가 정년(停年)입니다." 국립극단 원로배우 장민호(84), 백성희(83)씨가 최근 국립극장장실에서 들은 말이다. 일종의 퇴직 통보였다. 백씨는 "땅바닥을 보다 장민호씨 얼굴 쳐다보다 하면서 듣고만 있었다"고 했다. 국립극단 관계자는 29일 "퇴직연령상한제 도입으로 두 배우의 퇴직은 기정사실이고 시기 결정과 위로금 산정 작업이 남아 있다"면서 "필요에 따라 객원단원 형식으로 다시 모실 것"이라고 말했다.


장민호, 백성희씨는 누구

60년 넘게 무대에 오른 장민호, 백성희씨는 국립극단의 간판이었다. 장씨는 연극 《파우스트》의 파우스트, 《사추기》의 아버지 역으로 유명하다. 극작가 고(故) 이근삼은 "장 선생은 배우로서 국보급이니 기록을 남겨야 한다"며 그를 주인공으로 한 《그래도 세상은 살 만하다》를 쓰면서 극중극으로 《파우스트》를 넣었을 정도다.

백씨는 《달집》에서 40대 초반에 70대 노파를, 《장화 신은 고양이》에서는 50대 후반에 18세 소녀로 변신하는 등 '천의 얼굴'로 통했다. "작품은 가려도 배역은 가리지 않았다. '나한테 오기만 해! 넌 내 거야!' 하는 심정으로 살았다"는 배우다. 1954년에는 주한미군을 위문 방문한 마릴린 먼로와 한 무대에 오르기도 했다.

근년 들어 장민호, 백성희씨는 《태극기 휘날리며》 《봄날은 간다》 등 몇 편의 영화에도 출연했지만 1950년 창단부터 58년간 국립극단 무대를 지킨 '무대지기'였다. 극작가 노경식씨는 "피란지에서도 분 바르고 무대에 올랐고 웃음과 눈물, 감동을 준 명배우들"이라며 "정년제는 그들을 뒷방 늙은이로 내모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국립극장의 고민

그러나…. 현재 국립극단의 배우 25명 중 60세 이상이 7명이다. 단원 평균 연령이 50대일 정도로 고령화가 심각하다. 2004년 이후에는 새로 들어오거나 나간 단원도 없었다. 평가 제도가 사실상 요식행위라는 점, 큰 배역을 맡는다고 더 높은 수당을 받지 않는다는 점 등도 국립극단의 기량 저하를 불렀다. 국립극단 예술감독을 지낸 연출가 이윤택씨는 "이런 구조에 제한된 배우들이 자리를 장기 독점하고 있다"며 "더 재능 있고 다양한 배우들이 들어가 전력을 강화시켜야 한다"고 말했다.

국립극단이 관객에게 감동을 주지 못하고 있다는 점은 단원들도 인정한다. 한 단원은 "변화가 절실하다. 단원 '물갈이'가 필요하고 고육지책으로 택한 게 정년제"라고 했다.

1990년대 말 국립발레단·국립오페라단·국립합창단이 국립극장에서 독립해 나갈 때는 노조(勞組)가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단원 신분이 변동될 때 노사 합의는 필수다. 국립극단은 내년 봄 재개관하는 명동예술극장으로 옮겨가면서 자연스러운 구조 변화를 바랐지만 가망이 없어진 상태다.

정년제 외 대안은

장민호·백성희씨뿐 아니라 배우에겐 '전성기'가 있고 '전성기 이후'가 있다. 그리고 배우에겐 등장만큼 퇴장이 중요하다. 이윤택씨는 "강제적인 세대교체가 아닌 명예로운 퇴진이어야 한다"고 말했다. 좋은 예술은 냉엄한 경쟁 속에서 나온다는 점에서 더 엄격한 상시 오디션제 도입도 정년제의 대안이 될 수 있다. 연극평론가 김윤철씨는 "일본 신국립극장의 경우 전속극단은 있지만 정단원은 한 명도 없다. 매번 오디션을 통해 배우를 뽑아 공연한다"며 "1~2년마다 계약을 갱신하는 독일 방식도 참고할 만하다"고 말했다.

무대에서 덧없이 피고지는 게 배우의 숙명이다. 11월 공연하는 국립극단의 연극 《피고지고 피고지고》에 출연하는 남자 배우 3명도 '60세 정년제'로 이번이 마지막 공연이 될지도 모른다. 백성희씨는 "대사 까먹고 연기력이 바닥나면 그게 은퇴라고 생각했다. 바보스럽지…"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