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방울 명창(名唱) 앞에서 목숨 걸고 '쑥대머리' 불렀지"

  • 김성현 기자

입력 : 2008.10.30 03:25 | 수정 : 2008.10.30 07:25

● 올 '방일영 국악상' 수상 정철호 명인 인터뷰
"천애 고아였던 나를 받아준 스승… 15년간 소리 배우며 수발
국악원 만들 당시 방일영 前 회장이 지원… 두번 상 받는 셈"

서울 홍제동의 판소리 고법(鼓法) 보존회 지하 연습실. '1고수 2명창'이라는 말처럼, 북 장단과 추임새를 통해 판소리의 멋과 흥을 더하는 고수를 길러내는 이곳에서 올해 85세의 노(老) 명인이 지그시 북채를 잡았다. 일제 시대 소리 하나로 민초들의 설움을 달랬던 국창(國唱) 임방울 선생(1905~1961)의 제자 가운데 유일하게 생존해서 활동하고 있는 정철호(鄭哲鎬) 명인이다.

올해 제15회 방일영 국악상은 명창이자 명 고수이며, 아쟁 산조를 창안하고 수많은 창극과 판소리를 무대에 올린 창작자이기도 한 '전(全)방위 국악인'에게 돌아갔다. 선정 소식에 정 명인은 "못난 저만 이렇게 살아남아서…"라며 한참이나 스승의 사진을 바라보았다. 지금도 자신의 사진 위에 스승의 사진을 모셔놓은 정성은 그대로다.

◆목숨을 내놓고 불렀던 노래

아홉 살에 어머니를 여의고, 13세에 아버지마저 돌아가시자 정 명인은 그야말로 "조실부모(早失父母)에 천애 고아(天涯 孤兒) 신세가 됐다"고 했다. 해남 고모 댁에서 나무하고 불을 지피며 집안일을 도와드리던 소년 정철호는 '임방울 극단이 목포에 내려왔다'는 소식에 한길에 달려가 선생 앞에서 엎드려 절을 올렸다고 했다. "목청을 시험해보자"는 스승의 말에 임방울 명창이 즐겨 불러 일제 시대 한반도 전역은 물론, 만주와 일본까지 100만 장 이상의 음반 판매고를 올렸던 〈쑥대머리〉를 부르기 시작했다.

단원 30여 명이 모여있는 큰 방에서 스승의 곡으로 오디션인 동시에 입단 테스트를 받은 셈이었다. 정 명인은 "죽을 만치 떨렸지만, 목숨 내놓고 부른 셈"이었다고 했다. 노래가 끝났을 때, 스승은 환하게 웃고 있었다. 정 선생은 "지금 생각해도 꿈만 같다"고 했다. 사제(師弟)의 만남은 임방울 명창이 타계한 1961년까지 15년간 지속됐다. 그는 "광주 송정에서 제자 6명이 스승의 수발을 들며 소리를 배웠지만, 서울까지 따라온 건 나까지 두 명뿐이었다. 다른 제자들은 봄·가을 공연이 끝나면 돌아갈 집이 있었지만, 내가 돌아갈 곳은 오로지 스승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2008년 방일영 국악상 수상자로 선정된 판소리 고법 무형 문화재 정철호 명인이 21일 서울 홍제동 자택 마당 감나무 아래서 판소리 한 자락을 뽑았다. /허영한 기자 younghan@chosun.com
◆평생을 해도 모자란 스승 모시기

목을 틔우기 위해 고향 해남의 대흥사에서 100일간 소리 공부를 했고, 1947년 남원 명창 대회에 참가해 판소리 부문 1위에 입상했다. 스승 타계 직후인 1964년 임방울류 〈적벽가〉 완창(完唱) 음반을 녹음했고, 40여 년 뒤인 2005년에는 임방울 명창 탄생 100주년 기념 공연을 주관했으니 스승을 모시는 일에는 시한도 없다.

정악(正樂)을 위한 악기로만 알고 있던 아쟁의 가능성에 주목해서 처음으로 아쟁 산조를 빚어낸 것도 정 명인의 공으로 꼽힌다. 돈이 있어도 아쟁을 구하기 힘들던 시절, 정 명인은 직접 가야금 12줄에서 5줄의 안족(雁足)을 눕히고 1줄을 더 올려서 8현 아쟁을 손수 만들었다. 대흥사에서 6개월간 연습 끝에 서울로 올라와 최초의 아쟁 산조 발표회를 열었다. "나는 창시(創始)만 한 거고, 요즘은 젊은 세대들이 너무나 잘 타지요." 명인의 웃음에는 겸양까지 배어있다.

◆'영원한 현역'의 무대 욕심

1980년대부터는 이순신·권율·전봉준·이준·안중근·유관순·김구·윤봉길 등 수많은 열사와 위인의 삶을 창작 판소리와 창극으로 활발하게 무대에 올렸다. 그는 "내년 3·1절에는 유관순 열사가(歌)를 창극으로 공연한 뒤, 우리 국민들의 눈을 뜨게 한 성군(聖君) 세종대왕도 창극으로 국내외 무대에 올리고 싶다"고 말했다. '영원한 현역'의 무대 욕심에는 끝이 없다.

정 명인은 스승 임방울 명창의 절친한 벗이자 후원자였던 고(故) 방일영 전 조선일보 회장과도 두터운 인연이 있다. 1960년대 한국 국악원 설립을 위해 방 전 회장이 당시 400만원을 쾌척(快擲)한 것이다. 정 명인은 "그 덕분에 김소희 명창을 비롯해 명인·명창 11명을 모시고 국악원을 만들 수 있었다. 이번 국악상으로 나는 방일영 선생께 두 번 상을 받는 셈"이라며 미소 지었다.



◇정철호 명인이 걸어온 길

▲1923년 전남 해남 출생

▲1940년 임방울 명창에게 판소리 적벽가·수궁가·춘향가 사사

▲1947년 남원 명창 대회 판소리 부문 1등상

▲1948년 아쟁 산조 창시 발표회

▲1964년 임방울류 적벽가 완창(完唱) 음반 취입

▲1996년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고법 예능 보유자